제5장

박이안은 안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낯선 기색이 스쳤다.

그녀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이 여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처럼.

하지만 찬찬히 뜯어봐도 어디서 봤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박이안은 차가운 얼굴로 회의 테이블 앞에 가 앉았다.

안유진이 마치 원수를 노려보듯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아이가 자신의 차를 망가뜨렸는데, 용서를 빌기는커녕 감히 이런 눈빛으로 쳐다보다니.

어린 게 배짱 하나는 두둑하군. 제 아들이랑 똑같아!

“왜 당신 아이를 시켜 내 차를 망가뜨렸지?”

박이안은 입을 열자마자 안유진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

안유진은 주먹을 꽉 쥔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정이 격해져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말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그날 밤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본 걸까,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걸까?

눈앞의 남자가 그 야만적인 남자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안유진은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

그녀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떠보듯 물었다.

“당신… 저 모르세요?”

“모른다.”

“모른다고요?”

“내가 당신을 알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

안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

‘…….’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정말 평화, 꿈나와 무척 닮았다.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8할은 닮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모른다고 했고, 거짓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도 그 야만적인 남자와는 조금 달랐다.

안유진은 다시 한번 박이안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 자리에서 폭발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다 코 하나에 눈 두 개고, 닮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눈살을 찌푸리며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모르는 사이인데 왜 저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거죠? 이건 명백한 불법이에요!”

박이안의 얼굴이 굳어지자, 주용민이 끼어들었다.

“저희 사장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당신 아드님이 저희 사장님 차를 망가뜨렸다고요.”

“네?” 안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 저희는 외지에서 와서 오늘 막 진성시에 도착했어요. 제 아이가 어떻게 당신들 차를 망가뜨릴 시간이 있었겠어요? 저희는…….”

“CCTV 보여줘!” 박이안이 짜증스럽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곧이어 회의실의 대형 스크린에 서도역에서 일어난 일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화면 속 안꿈나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안유진은 한눈에 알아봤다!

네 개의 바퀴가 어떻게 파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차체에 난 흠집은 분명 그녀의 아들, 안꿈나가 낸 것이었다!

“저… 저런… 죄송합니다. 저는 전혀 몰랐던 일이에요…. 영상에 마스크 쓴 아이는 분명 제 아들이 맞지만, 우리 애는 아주 착해요. 절대로 이유 없이 당신 차에 흠집을 낼 아이가 아니에요.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박이안은 줄곧 그녀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자,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당신 아들이 폭약을 다룰 줄 안다는 건, 알고 있었나?”

“폭약이요? 그럴 리가요. 그렇게 어린애가 어떻게 그런 위험한 걸 다루겠어요.”

“하지만 이 네 바퀴는, 그 아이가 정밀 폭약으로 터뜨린 거다.”

안유진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서둘러 해명했다.

“알겠어요! 오해하신 거예요. 그건 폭약이 아니라 작은 불꽃놀이 폭죽이에요. 우리 꿈나가 증조할아버지랑 같이 폭죽 만드는 걸 좋아하거든요. 진성시에 올 때 증조할아버지께서 몇 개 선물로 주셨어요. 죄송합니다. 그게 그렇게 위력이 클 줄은 몰랐어요. 알았다면 절대 못 가져오게 했을 거예요.”

안유진은 조금도 거짓말하는 기색 없이 진심으로 사과했다.

박이안은 안유진을 잠시 쳐다보다가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불꽃놀이 폭죽과 폭약은 원리가 같다. 폭죽도 위력이 있을 수 있고, 시골에는 실력 좋은 연로한 장인들이 많다.

게다가 주용민이 조사한 바로도, 그들 네 식구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에게 해를 가할 능력은 없어 보였다.

자신이 과민하게 반응한 모양이었다.

박이안은 경계심을 풀었고, 이내 안유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는 주용민에게 말했다. “자네가 처리해.”

그러고는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며 더 이상 안유진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용민은 미리 준비해 둔 배상 합의서를 꺼내 들었다.

“안유진 씨, 아이가 본인 아들이라는 것도 인정하셨고, 이제 증거도 확실하니 배상하시죠.”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받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박이안은 자선사업가가 아니었다. 수십억짜리 차가 망가졌는데, 어른이 아이의 잘못을 너그럽게 봐줄 리 만무했다.

자식의 잘못은 부모의 책임이다. 이것이 바로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어머니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

안유진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꿈나가 이유 없이 차를 망가뜨렸을 리 없다고 믿었지만, 어쨌든 남의 차를 고의로 훼손한 것은 꿈나의 잘못이 맞았다.

안유진은 멋쩍게 물었다. “얼… 얼마를 원하시는데요?”

“95억 원입니다.”

“네?!” 안유진의 목소리가 몇 톤은 높아졌다. “95억 원이요? 차라리 도둑질을 하겠다고 하시죠!”

주용민은 당황했다. “?!”

메시지에 답장하던 박이안도 멈칫했다. “……”

“합의하기 싫으면, 경찰에 신고하지.” 박이안의 목소리에 불쾌함이 묻어났다.

안유진은 다급하게 외쳤다. “경찰은 안 돼요!”

지금 증거가 확실해서 꿈나에게 불리했다. 경찰에 신고하면 보호자인 자신이 잡혀갈 게 뻔했다. 만약 감옥에라도 가게 되면, 아이들은 어떡하란 말인가?

“그, 그 차가 95억 원이나 해요?”

“네. 그 차량의 현재 시가입니다.”

안유진은 주용민이 건네는 서류를 받아 보고는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저… 합의하기 싫다는 건 아니에요. 배상도 할 수 있는데, 제가, 제가 정말 그렇게 큰돈이 없어서요. 좀 깎아주시면 안 될까요?”

주용민은 감히 결정하지 못하고 박이안을 쳐다봤다.

박이안은 안유진을 곁눈질하며 차갑게 물었다. “얼마나 배상할 수 있지?”

안유진은 우물쭈물했다. “95… 95만 원은 안 될까요?”

박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

주용민도 할 말을 잃었다. “……”

95억 원을 95만 원으로. 이건 그냥 0 네 개를 지워버린 수준이었다.

“경찰에 넘겨! 법대로 처리해!”

박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나가버렸다. 안유진에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다.

안유진은 당황해서 그를 급히 불렀다. “잠깐만요!”

박이안은 들은 척도 않고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안유진은 이를 악물고, 결심한 듯 외쳤다.

“돈을 받고 싶으면, 당신부터 벗어요!”

박이안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춘 채 돌아봤다. “뭐라고?”

“벗으라고요! 재킷이랑 셔츠 다 벗어요. 다 벗으라고요!”

박이안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

주용민을 비롯한 모두가 경악했다. ‘!!!!!!’

저희 사장님을 유혹하는 여자는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들어오자마자 옷부터 벗으라고 소리치는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 여자, 예쁘장하게 생겨서는 엄청난 돌직구잖아!

박이안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얼굴은 무섭도록 검게 변해 있었다. 그는 안유진을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건가?”

안유진은 그의 눈에 서린 살기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지만, 억지로 버티며 말했다.

“돈을 받고 싶으면, 당신 옷부터 벗으라고요.”

95억 원. 죽었다 깨어나도 마련할 수 없는 돈이었다. 하지만 감옥에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정말 그날 밤의 그 야만적인 남자인지 확인해야만 했다!

만약 그가 맞다면, 그녀는 그 하룻밤으로 이 95억 원을 퉁칠 생각이었다!

그는 분명히 약속했다. 그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주겠다고. 그가 주는 행복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저 이번 일만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아이들은….

그는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낳은 줄도 모르니, 당장은 아이들을 뺏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이안과 이혼하고 나면, 바로 아이들을 데리고 진성시를 떠나 멀리 도망쳐서,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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