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S시, 화려한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석 달간의 촬영을 마친 서지은이 탄 비행기는 네 시간의 비행 끝에 마침내 공항에 착륙했다.

짐을 찾고 출국장으로 나온 그녀는 당연히 회사에서 차를 보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출국장을 나서자마자 강씨 본가의 이 기사가 검은색 롤스로이스 옆에 공손하게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캐리어를 끌고 다가가자 이 기사는 짐을 받아 들고는 차 문을 열어주었다.

차 안에는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는 칼로 벤 듯 냉정한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남자는 그녀와 결혼한 지 2년 된 남편, 강시혁이었다. 그가 공항에 마중 나올 줄은 몰랐기에 그녀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곧 오늘이 계약 기간이 끝나는 날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그가 온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차에 올라타 남자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강시혁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했었다. 2년 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이 앉아보는 것이었다.

그에게서 은은하게 풍기는 머스크 향수 냄새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이 기사가 트렁크에 짐을 싣고 운전석으로 돌아와 차를 몰아 공항을 빠져나갔다.

차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옆에 앉은 남자는 굳은 얼굴로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숨 막히는 저기압에 서지은은 잔뜩 긴장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호흡마저 가빠지는 듯했다.

이십 분 후, 롤스로이스가 강씨 본가 대저택 문 앞에 멈춰 섰다. 집사가 재빨리 달려와 뒷좌석 문을 열자 강시혁이 긴 다리를 뻗어 차에서 내렸다. 그는 ‘서재로 와.’라는 차가운 말만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는 내내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 서지은의 신경은 이 순간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재로 들어섰을 때, 남자가 서랍에서 이혼 서류를 꺼내 그녀 앞에 던져 놓았을 때도 그녀는 이상할 만큼 평온한 태도를 보였다.

“이혼하자.”

석 달 만에 만난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심장을 깊숙이 찌르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10년 동안 그를 좋아했다. 강시혁 회장의 아내라는 자리를 얻으면 또 무엇하랴? 그의 몸도, 그의 마음도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지연이 올해 스무 살이죠.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됐네요.”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강시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잘생긴 눈매에 언짢은 기색이 스쳤다.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옆에 있던 펜을 건넸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화장을 지운 탓에 입술색이 옅어 보여 얼굴도 창백해 보였다.

강시혁은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 “사인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건넨 펜을 받아 들었다. 협의서 내용은 보지도 않고 바로 마지막 장으로 넘겨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펜을 내려놓은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시혁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그 아름다운 눈동자는 예전처럼 별과 바다를 담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는 눈빛은 마음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오늘은 좀 늦었으니 내일 나갈게요. 그래도 될까요?”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강시혁이 조금이라도 옛정을 생각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이 기사가 호텔까지 데려다줄 거야.”

이렇게 바로 내쫓겠다는 건가?

하룻밤도 더 머물게 해줄 수 없다는 건가?

그녀의 미소는 얼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강시혁과 잠시 마주 보며 대치하던 그녀는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자기 방으로 돌아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을 챙긴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몇몇 하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도와주려고 달려왔지만, 그녀는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하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일렬로 서서 그녀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곳에서 2년 동안 살면서 서지은은 이곳에 정이 조금 들었다. 강시혁을 제외한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그녀에게 아주 잘해주었다.

그녀는 조금 아쉬웠지만, 강시혁과 결혼하고 2년 내내 냉대를 당하며 정신적으로 충분히 망가질 만큼 망가졌다.

이쯤에서 끝내자.

이제는 끝낼 때가 되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꾹 참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차에 올라탔다. 이 기사는 그녀를 시내 중심가의 한 고급 호텔에 내려주고는 차를 몰아 떠났다. 그녀는 체크인을 마치고 네 시간 넘게 꺼져 있던 휴대폰을 켰다.

아버지 서명수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 알림 문자가 와 있었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고 서명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지은아, 지연이 병이 재발했다.” 서명수의 목소리는 무척 잠겨 있었고, 깊은 무력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놀라 물었다. “언제요?”

“일주일 전에.”

“왜 저한테 말씀 안 하셨어요?”

“네가 촬영 중이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서지은은 잠시 침묵했다. 2년 전, 자신의 골수를 기증해 서지연을 살렸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문득 서명수가 전화를 건 의도를 알아차렸다.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시혁이가 이미 최고의 의사를 붙여줬고, 병원에서도 골수 은행에서 지연이랑 일치율이 아주 높은 골수를 찾았다고 하더구나. 네가 할 건 없어. 시간 날 때 와서 얼굴만 좀 비춰주면 된다.”

서지은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명수는 서지연의 병실 호수를 알려주며 되도록 빨리 가보라고 했다. 서지연이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면서.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아파왔다. 그녀는 희미하게 ‘네.’라고 대답하고는 서명수가 다시 입을 열 기회를 주지 않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은 너무나도 길었다. 그녀는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 두 시에 레드 와인 한 병을 시켜 반 병 넘게 마시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점심 무렵, 그녀는 매니저의 전화에 잠이 깼다. 매니저는 요즘 아주 핫한 전원생활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라고 권했다. 그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사람들은 모두 떴다고 했다.

“거절해 주세요. 저 너무 피곤해서 휴가 좀 갖고 싶어요.”

매니저는 거의 폭발할 뻔했다. “휴가가 네가 쉬고 싶다고 쉴 수 있는 건 줄 알아? 데뷔 3년 동안 스킨십 있는 장면 안 찍고, 예능 안 하고, 이슈 안 만들고, 남자 연예인이랑 엮어서 스캔들 내는 것도 안 하고. 회사가 네 요구 다 들어줬는데 아직도 뭘 더 바라는 거야? 3년 동안 발전하려는 의지가 하나도 없잖아. 이러다 너 조만간 묻힐 거야.”

“묻히면 묻히는 거죠.”

“서지은, 너….”

서지은은 짜증이 나서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일어나 욕실로 가서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매니저에게서 계속 전화가 걸려와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몸단장을 마친 그녀는 오랫동안 못 본 친구 고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며칠 신세 좀 지고 싶다고 하자 고혜연은 뛸 듯이 기뻐하며 두말없이 차를 몰고 그녀를 데리러 왔다.

고혜연의 집에 도착해 간단히 짐을 정리한 후, 그녀는 고혜연과 함께 밥을 먹고 중앙병원으로 향했다.

서지연은 1인실에 입원해 있었고 전담 간병인이 있었다. 문에 달린 유리창 너머로 간병인이 서지연에게 밥을 먹여주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몇 숟갈 먹지 못하고 서지연은 전부 토해냈다. 그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

서지연은 그녀의 이복동생으로,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그녀보다 다섯 살 어렸고, 올해 막 스무 살이 되었다. 어렸을 때 둘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서지연은 그녀를 무척 따랐고, 늘 쫄래쫄래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다. 둘 다 강시혁을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오랜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2년 전, 서지연이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강시혁은 거의 미쳐 날뛰었다.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강시혁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 챕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