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그녀의 혈액 검사 결과는 아무 문제 없었고, 조직 적합성 검사에서도 거부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서지연을 살릴 수 있었다.
설령 아픈 사람이 생판 모르는 남이었더라도 그녀는 주저 없이 골수를 기증했을 것이다. 하물며 상대는 자신의 친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결정을 입에 담기도 전에, 강시혁은 이미 그녀가 냉혈한이라 서지연을 구하지 않을 거라 단정해 버렸다. 그는 서지연을 위해 그녀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애원했고, 그 비굴한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녀는 강시혁이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까지 비굴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그녀는 강시혁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 함께 자란 그들은 소꿉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강시혁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다른 남학생들과 싸우기도 했고, 그녀의 공부를 봐주기 위해 함께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곁을 이렇게 오래 지켰으니, 마침내 그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감정이란 원래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법이니까.
그녀는 서지연처럼 애교를 부릴 줄도, 서지연처럼 강시혁의 환심을 살 줄도 몰랐다. 강시혁은 두 사람 모두를 아꼈지만, 서지연에게 주는 보살핌은 더욱 다정하고 따뜻했다.
그는 서지연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지은의 가슴에 통증이 번졌고, 눈가는 어느새 축축해졌다.
그녀는 강시혁이 자신을 제 친동생조차 죽게 내버려 두는 냉혈한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그녀는 잔뜩 화가 나 있었고, 그 화에 이성을 잃은 나머지 그 기회를 이용해 강시혁에게 결혼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녀는 강시혁 회장의 아내 자리를 원했다.
비록 강시혁이 그녀에게 준 시간은 고작 2년이었지만, 그녀는 미련 없이 결혼했다. 2년이면 강시혁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녀를 난도질했다.
그녀는 졌다. 아주 비참하게.
“네가 여긴 무슨 낯으로 와?”
등 뒤에서 문득 한 여자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지은은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닦았다. 어느새 등 뒤에 서 있는 하미화를 발견하자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 여자는 그녀의 새어머니였다. 이제 막 마흔이지만 관리를 잘해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옷차림은 매우 세련되고 우아했다. 서명수와 결혼하던 해, 하미화는 겨우 스무 살, 한창 젊고 아름다울 때였다.
그때는 어머니가 막 돌아가신 직후였는데, 서씨 집안의 가사도우미였던 하미화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아이는 서명수의 아이였다.
“고양이 눈물만큼 흘리면서 시늉하는 건 집어치워.” 하미화가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그녀를 거칠게 밀치며 병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잡고 뒤따라 들어갔다.
그녀를 본 서지연의 흐릿했던 두 눈이 확연히 빛나며 다정하게 언니라고 불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서지연의 손을 잡았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들었어.”
서지연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 달이나 못 봤잖아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순수하고 착한 서지연을 마주할 때마다 서지은의 마음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연적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아끼고 예뻐하던 동생이었다. 동생이 아플 때, 그녀는 동생이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고, 그 기회를 이용해 강시혁 회장의 아내 자리를 꿰찼다. 그녀는 서지연이 자신을 미워할 거라 생각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마주치기만 하면 살벌해지는 장면을 수없이 상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지연은 여전히 그녀를 따랐고, 그것이 바로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부분이었다.
그녀는 서지연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서지연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비열한 악당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침 휴가라서, 너랑 같이 있어 줄 시간 많아.” 그녀는 눈시울을 붉힌 채 웃으며 말했다.
서지연의 미소가 환하게 피어났다. “잘됐다. 언니가 앞으로 매일 나 보러 왔으면 좋겠어요. 퇴원할 때까지. 그럴 수 있어요?”
“당연하지.”
옆에 있던 하미화가 눈을 흘기며 서지은을 증오에 찬 눈으로 쏘아봤다.
서지연 앞이라 차마 싫은 내색은 못 했지만, 서지은을 볼 때마다 강시혁이 서지은과 결혼한 탓에 서지연이 하루 종일 넋이 나가 산송장처럼 지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서지은에 대한 증오심을 억누르며 서지연을 겨우 달래 재운 뒤, 서지은에게 차갑게 말했다. “좀 이따 강시혁 씨가 지연이 보러 올 거야. 껄끄러워지기 싫으면 그만 가 봐.”
서지은은 말없이 일어섰다. 깊이 잠든 서지연을 마지막으로 한 번 쳐다본 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병실 문을 열자 등 뒤에서 다시 하미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지연이 보러 오지 마. 애를 그렇게 상처 입혀 놓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얘를 봐.”
서지은은 아무 말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이런 취급에는 이제 익숙했다.
병실 문을 조용히 닫은 그녀는 복도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아 고개를 깊이 숙였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고혜연은 차에서 한참 동안 서지은을 기다렸다. 불안한 마음에 입원 병동으로 찾아 나섰다가, 복도 의자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서지은을 발견했다. 그녀가 다가가려던 찰나, 엘리베이터에서 강시혁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서지은을 보고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서지은은 어릴 때부터 강시혁의 뒤를 쫓아다녔다. 그녀는 그의 발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익숙한 발소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지연이 보러 왔구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웃는 얼굴로 강시혁을 바라봤다.
그녀의 두 눈은 펑펑 울어 새빨갛고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얼굴의 화장은 번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강시혁이 무심하게 ‘응.’ 하고 대답했다. “지연이는 보고 가는 길이야?”
“응, 봤어.”
어쩌면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가여워 보였기 때문일까. 강시혁은 뜻밖에도 그녀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지연이 곧 골수 이식받을 수 있을 거야. 괜찮아질 거야.”
“알아.”
강시혁은 더 이상 말없이 몸을 돌려 병실 문을 밀었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연이 좀 잘 부탁해.”
어차피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서지연에게 돌려주자.
남자의 동작이 잠시 굳었다.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내가 알아서 잘 돌볼 거야. 네가 일깨워 줄 필요 없어.”
그의 말투에는 역력한 분노가 서려 있었고,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 강시혁은 마침내 그녀에게서 벗어나 서지연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이야말로 강시혁이 꿈에 그리던 날일 텐데, 왜 아직도 그녀에게 화를 내는 걸까.
그는 그녀가 그렇게나 못마땅한 걸까?
그렇게나 그녀를 미워하는 걸까?
강시혁은 이미 병실로 들어갔지만, 서지은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멍하니 병실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고혜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서둘러 달려가 그녀를 잡아끌고 입원 병동을 빠져나왔다.
그 후 한동안 그녀는 매일 병원에 가서 서지연을 봤다. 환영받지 못하는 걸 알기에 병실에 들어가지는 않고, 그저 병실 문 유리를 통해 서지연을 한 번씩 쳐다볼 뿐이었다.
가끔 강시혁이 서지연을 데리고 아래층으로 산책을 나가면, 그녀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강시혁이 그녀에게 얼마나 차갑고 귀찮아하는지, 그만큼 서지연에게는 얼마나 다정하고 세심한지, 그 극명한 차이를 그녀는 눈에 담고 가슴에 새겼다.
한 달 후, 서지연은 골수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수술 후 거부 반응이나 합병증 없이 순조롭게 회복되었다.
서지은은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동안 강시혁은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그는 그녀와 함께 구청에 가서 이혼 수속을 밟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그녀는 그가 서지연을 극진히 보살피는 모습을 볼 만큼 봤다.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날, 그녀는 먼저 강시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참 울린 뒤에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차갑고 싸늘한 목소리였다.
“이혼 수속은 언제 밟을 거야?”
남자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 아직 서명 안 했어.”
“?”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가 아직도 이혼 서류에 서명을 안 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