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정 선생님, 이건 제 남자친구 사주팔자인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벌써 보름째 연락이 안 돼요!”

북원동 모퉁이에 있는 한 카페 안, 정령은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자에게 애원하는 눈빛으로 붙잡혀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정령은은 이런 평범한 점괘 따위는 절대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전과 사정이 달랐다.

하아.

정령은은 잡념을 떨쳐내고 여자가 건넨 사주팔자를 바탕으로 눈을 감고 손가락을 꼽아 점을 쳤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떴다.

“나가서 왼쪽으로 500미터 가면 나오는 제로 바, 2층 211호실이요.”

정령은은 정확한 주소를 줄줄 읊었다.

“감사합니다, 정 선생님!”

여자는 기쁨에 겨워 울먹이며 가방을 챙겨 막 떠나려다, 이내 다시 정령은을 돌아보았다.

“정 선생님, 저랑 같이 가주실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제가 자기 행방 쫓는 걸 제일 싫어해서요. 선생님이랑 같이 가면 친구랑 왔다고 둘러댈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을 마친 그녀는 정령은이 거절할까 봐 한마디 덧붙였다. “돈은 더 드릴게요!”

정령은은 그제야 마지못해 그녀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여자의 뒤를 따르며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M: 언제 귀국해요?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삼계탕 끓여 놨는데.]

늘 그랬듯, 메시지는 보내자마자 감감무소식이었다.

정령은은 이미 익숙했다. 주윤우가 그저 너무 바빠서 메시지를 못 본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게다가 외국과 한국은 시차도 있지 않은가.

500미터의 거리를 두 사람은 고작 6분 만에 주파했다.

남자친구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여자는 바에 도착하자마자 211호실로 직행했고, 뒤따르던 정령은은 느긋하게 걸었다.

제로 바는 해성시에서 최고로 꼽히는 곳으로, 이곳에 드나드는 이들은 모두 부유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정령은이 바에 온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결혼 전에는 친구들과 주윤우 몰래 오곤 했지만, 결혼 후에는 발길을 끊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내조’였다.

그녀는 주윤우에게 줄 수 있는 신뢰를 모두 주었다.

그가 단 한 번도 자신을 공식 석상에 데려간 적 없고, 매일 집에 들어오지도 않으며, 심지어 밖에서 스캔들이 파다하게 퍼져도, 정령은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그를 점쳐보지 않았다.

정령은은 그를 사랑한다면 신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주윤우는 바람을 피울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그녀의 시선이 문득 한 곳에 꽂혔다.

209호실의 문이 반쯤 열려 있어, 그녀가 선 위치에서 방 안의 절반가량이 보였다.

그 안에는 그녀에게 아주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그녀의 법적 남편, 주윤우였다.

정령은의 손이 이미 문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여자 때문에 걸음을 멈췄다.

여자는 주윤우의 무릎에 앉아 다정한 자세로 술잔을 들어 올렸고, 이내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그와 러브샷을 했다.

‘쾅’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앞의 광경에 정령은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고,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왜… 주윤우는 거절하지 않았을까?

내가 정연우를 싫어하는 걸 알면서, 왜 나 몰래 만난 걸까?

심지어 이렇게나 친밀한 행동까지?

정령은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손을 꽉 쥐고, 방 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가슴이 무언가에 짓눌린 듯 숨이 막혔다.

“연우야, 이번에 돌아오면 다시 안 갈 거지? 내 생각엔 말이야, 애초에 떠나야 했던 건 그 정령은이었어!”

“정씨 집안 진짜 아가씨면 뭐 해? 15년을 산골에서 자랐는데, 이 바닥 또래 애들이랑 비교하면 출발선부터 뒤처진 거잖아. 그래놓고 뻔뻔하게 윤우 형한테 시집가겠다고 하고. 쯧, 난 살면서 그렇게 낯짝 두꺼운 사람은 처음 봤다!”

“윤우 형, 이번에 형이 직접 출국해서 연우 데려온 거, 정령은이랑 이혼하려고 그러는 거지?”

“이참에 빨리 이혼해 버려. 형이 처음에 왜 정령은이랑 결혼에 동의했는지 알잖아. 정씨 집안에서 걔가 연우 괴롭힐까 봐 그런 거 아니었어? 이제 연우도 강해졌으니, 윤우 형도 더는 그렇게 참고 살 필요 없지.”

친구들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하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주윤우에게 쏠렸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청년의 이목구비는 차가웠고, 눈매는 깊었다.

재킷은 벗어서 한쪽에 걸어두고, 안에 입은 흰 셔츠 차림으로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채 빈 술잔을 쥐고 있었다.

질문을 받은 그는 잘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내 그가 말했다. “변호사한테 이혼 합의서 작성하라고 시켰어.”

남자의 목소리는 첼로처럼 낮게 울렸다.

하지만 정령은의 귀에는 지옥에서 온 심판처럼 들렸다.

이혼?

주윤우가 그녀와 이혼하겠다고 말했다.

그 결론에 도달하자 정령은의 머리가 핑 돌았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뼛속까지 시렸다.

가녀린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알고 보니 주윤우는 오래전부터 그녀와 이혼하고 싶었고, 심지어 그녀와 결혼한 것조차 정연우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5년간의 어렸던 짝사랑과 2년간의 결혼 생활이 이 순간 한 편의 코미디가 되어버렸다.

정령은은 갑자기 모든 것을 깨달았다.

보름 전.

그녀는 A형 독감에 걸려 온몸이 죽을 것처럼 아팠다.

그녀는 주윤우가 돌아와 자신을 돌봐주길 바랐다.

하지만 수십 통을 걸어도 전화는 받지 않았고, 다음 날 겨우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주윤우의 비서였다.

그는 주 대표님이 해외 출장 중이며, 언제 돌아올지는 모른다고 했다.

이제 와 보니, 주윤우는 출장을 간 게 아니라 정연우를 데리러 간 것이었다.

심장이 쥐어짜는 듯 아파오고, 질식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주윤우가 그녀와 결혼한 이유를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녀 자신만 몰랐다.

그녀는 마치 광대 같았다.

어쩐지 스승님이 그녀가 주윤우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그가 좋은 배필이 아니라고 말했었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온몸을 휩쓸었다.

정령은은 갑자기 너무 지쳐서, 더 이상 버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첫사랑에 체면이라도 차리며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정령은은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심장을 에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섰다.

“너…”

갑자기 뛰어든 사람에 한 남자가 불쾌한 듯 막 욕을 하려다,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말을 뚝 그쳤다.

“정령은?”

그 말이 떨어지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 안의 조명이 그리 밝지 않아,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 반쪽이 어둡게 그늘져 보였다.

그녀는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오직 주윤우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청년의 눈에 스친 놀라움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

오히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정연우가 순간 당황했다.

“언니? 내 말 좀 들어봐, 설명할게. 언니가 본 그런 게 아니야. 형준 오빠네가 내가 돌아온다고 환영 파티 열어준 거야…”

여자의 목소리는 애교 섞이면서도 다급함이 묻어났다. 정말로 정령은이 오해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정령은에게는 그저 시끄럽게만 들렸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며 참을 수 없이 아팠다.

그녀는 손을 들어 몇 번 문지르며,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주윤우… 나한테 뭐 설명할 거 없어?”

그녀는 주윤우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가운 얼굴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나 미행했어?”

자존심과 마음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정령은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주윤우, 우리 이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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