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글자는 가볍게 흩날렸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정령은이 주윤우와 이혼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여자가 먼저 꺼낸 이야기였다! 이건 정말이지 신선한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정령은이 느끼는 절망과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남의 불행을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당사자인 주윤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정령은을 차갑게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정연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자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금 정령은이 분명 자신과 주윤우가 러브샷을 하는 장면을 봤을 거라고 짐작했다.
“언니, 오해야. 나랑 윤우 오빠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오늘 외국에서 같이 돌아온 건 그냥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고……. 언니가 날 보기 싫다면, 나 지금 바로 갈게.”
정연우는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촉촉한 눈에는 물기가 서려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애처롭게 했다.
정령은은 머리가 더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체면이라도 지키려 애쓰며, 손바닥을 꽉 쥔 채 정연우를 바라봤다.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정말 대단한 우연이네. 근데 한 가지는 네가 맞았어. 나도 정말 네가 보기 싫거든.”
싸늘한 말투와 경멸 어린 눈빛은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정연우는 순식간에 그들의 보호 아래로 숨었다.
“정령은, 연우는 내가 데려왔어. 누가 보기 싫으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제일 보기 싫은 건 바로 너야!”
“다 너 때문에 연우가 고향을 등지고 2년이나 외국에 나가 있어야 했잖아. 내 생각엔 처음부터 네가 떠났어야 했어!”
“연우야, 무서워하지 마. 오늘 우리가 네 편이 되어 줄게. 게다가 윤우 형도 있잖아. 정령은 쟤, 감히 어쩌지 못할 거야.”
몇몇이 입을 모아 정령은을 비난했다.
한참 동안 조용히 있던 주윤우마저 그녀에게 말했다. “그만 소란 피워, 정령은. 연우한테 사과해.”
소란 피운다고?
하.
정령은은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 온몸이 차갑게 떨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편이 아닌 건 상관없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마저 자신과 반대편에 서서 진심을 진흙탕에 처박아 짓밟아 버리니, 정말이지 한 푼의 가치도 없게 느껴졌다.
정령은은 자신이 참 가련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아 눈의 고통을 감추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얼굴에는 이미 비웃음이 가득했다.
여자의 시선은 정연우 앞에 선 청년을 지나, 그녀의 가련한 얼굴에 정확히 꽂혔다.
“사과? 정연우, 네가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널 괴롭혔다는 핑계로 몰래 외국으로 도망가서 애까지 지우고 왔으면서. 저 사람들한테 할 말 없어? 난 억울하게 누명만 썼는데 말이야.”
정령은의 말투는 지극히 평탄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가 돌멩이처럼 그들의 심장에 박혔다.
방금 정령은이 뭐라고 했지?
정연우가 낙태하러 외국에 갔었다고?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인가!
누군가 잔뜩 화가 나 정령은에게 손가락질하며 혐오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거기서 헛소리 지껄이지 마! 연우가 어떻게 임신을 해? 남자친구도 없는데!”
“임신이랑 남자친구 유무가 무슨 상관인데?”
정령은이 받아쳤다. 그녀는 정연우의 목을 감싼 두 손에서 시선을 거두고, 이준호가 자신을 가리키는 검지로 눈길을 옮겼다.
“그 손 필요 없으면 필요한 사람한테 기증이나 하시지.”
정령은의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연우가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서럽게 울면서도 꿋꿋한 척 연기했다.
붉어진 눈으로 정령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내가 미운 건 알지만, 어떻게 내 명예를 이렇게 더럽힐 수 있어! 언니가 아빠, 엄마의 친딸인 거 알아. 나 언니 거 아무것도 뺏을 생각 없었어. 이번에도 그냥 떠나서 다시는 안 돌아오려고 했는데, 아빠랑 엄마가 죽겠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거야…….”
정연우는 다른 이야기로 그들의 주의를 돌리려 애썼다.
임신 사실은 아무도 모를 텐데! 친한 친구나 절친에게조차 숨겼던 비밀인데, 정령은은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정연우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눈물은 더 빠르고 거세게 흘러내렸다.
상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만해!”
주윤우의 주변 온도가 영하로 떨어졌다. 길고 검은 눈에는 서리가 가득했다.
그는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말을 쏟아내는 정령은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정령은, 연우는 네 동생이야. 네가 한 말들이 소문나면 걔 인생은 끝장이라는 거 몰라!”
청년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는 여자를 향한 질책이 가득했다.
심장은 여전히 아팠지만, 이미 무뎌질 대로 무뎌졌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주윤우는 저렇게 정연우를 감싸고 돌았다.
바로 그 순간, 정령은의 마음속에서 자신을 위해 말해주던 첫사랑은 죽어버렸다.
그녀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는 비웃음만이 가득했다.
주윤우는 그런 정령은을 보며 까닭 모를 답답함을 느꼈다. 그 이유를 곱씹어볼 틈도 없이, 또 다른 누군가가 정령은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너처럼 악독한 사람은 처음 본다! 솔직히 말해줄까? 그 옛날 연우가 먼저 떠나지 않았으면, 주 사모님 자리는 너한테 돌아가지도 않았어! 이제 연우가 돌아왔으니, 너도 원래 주인한테 돌려줘야지!”
시끄러웠다.
정말이지 시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주 사모님 노릇 좀 잘해보겠다고 애썼더니, 이제는 개나 소나 머리 위에 올라와 똥을 싸려고 했다.
정령은의 눈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말을 뱉은 청년을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악독하다고? 네 만 분의 일이라도 따라갈까 싶은데. 집안에 돈 좀 있다고 남의 입학 정원이나 가로채고, 사람까지 동원해서 상대를 반쯤 죽여놓고 바다에 던져 물고기 밥으로 줬잖아. 심지어 그 사람 동생까지 덮쳤으면서.”
“그리고 내가 정연우의 주 사모님 자리를 뺏었다고? 쟤한테 한번 물어봐. 그 옛날에 감히 결혼할 수 있었는지. 감히 주윤우를 애 아빠로 만들 수 있었겠냐고.”
정령은의 냉소적인 한마디에 두 사람은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정령은이 이렇게 은밀한 일까지 알고 있는 거지?
이준호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분명 아버지가 빈틈없이 처리했던 일인데, 이제 와서 만천하에 드러나 버렸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그는 악의에 찬 눈빛으로 정령은을 쏘아보았다. 분노가 그의 뇌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준호는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가, 손을 치켜들어 정령은의 뺨을 향해 휘둘렀다.
주윤우가 막을 틈도 없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따귀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묵직하게 넘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준호는 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정령은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보지도 못했는데, 이준호는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주윤우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자신의 친구들에게 데려간 적이 없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막말을 해도, 청년은 제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예전에는 주윤우를 사랑했기에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이제 사랑하지 않는데, 뭣 때문에 참아야 한단 말인가?
“이준호 형!”
정신을 차린 정연우가 목멘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언니, 이준호 형은 언니랑 아무 원한도 없는데, 어떻게…….”
“너는 말 좀 하지 마. 역겨우니까.”
정령은의 눈에는 정연우를 향한 혐오감이 흘러넘칠 듯했다.
그녀는 주윤우가 또다시 차가운 얼굴로 사과하라고 할 것을 예상했다. 갑자기 극심한 피로감이 온몸을 덮쳤다.
그때 주윤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정령은이 그의 말을 끊었다.
“주윤우, 내일 아침 여덟 시에 구청에서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