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님의 주름진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굳이 화를 내지 않아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거실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노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차례로 훑었고, 마침내 정령은의 몸에 닿자 눈빛이 순간 부드럽게 풀렸다.
“령은이 왔구나? 미안하구나, 이 할아비가 아까 일이 좀 있어서 늦었다. 어서 앉아라. 박미영, 가서 차 한 주전자 내오너라. 저번에 가져온 좋은 찻잎으로!”
이름이 불린 가사도우미는 온몸을 화들짝 떨었다. 그녀는 주윤우의 어머니 눈치를 한번 살피고 나서야 허둥지둥 부엌으로 향했다.
주연서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할아버님의 편애에 불만을 가득 드러냈다.
“할아버지, 대체 누가 진짜 손녀예요? 정령은은 그냥 남이잖아요! 더러운 수작이나 부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주씨 집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겠어요?”
손녀의 무례한 발언에 노인은 즉시 얼굴을 굳혔고, 눈에는 분노가 서렸다.
“주연서,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느냐. 령은이는 네 새언니다. 존중할 줄 알아야지! 네 어미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가정교육이라곤 하나도 없구나!”
그 말에 주연서는 억울한 듯 어머니의 팔을 꽉 붙잡았고, 모녀의 얼굴은 몹시 굳어졌다.
반면, 한쪽에서 유유히 앉아 있던 정령은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주연서는 화가 나 얼굴과 목이 시뻘게졌다.
그녀는 정령은을 쏘아붙이며 반박했다. “새언니는 무슨 새언니예요! 게다가 정령은은 이제 오빠랑 이혼했잖아요. 다시는 이 집에 발도 들이면 안 된다고요! 우리 주씨 집안은 저런 굴러먹던 여자가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이에요….”
“짝!”
할아버님이 굳은 얼굴로 주연서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가 미처 끝맺지 못한 말들이 전부 목구멍으로 도로 들어갔다.
“연서야!”
주윤우의 어머니가 초조하게 소리쳤다.
주연서는 얻어맞은 왼쪽 뺨을 감싸 쥔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눈물이 순간 눈가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친할아버지가 저런 남을 위해 자신을 때리다니!
주 회장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방으로 돌아가서 주씨 집안 가규를 열 번 베껴 쓰거라!”
주씨 집안이 지금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 회장님 덕분이었다. 이제는 늙어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주연서는 울면서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주윤우의 어머니가 뒤쫓아가려 몸을 돌리자마자,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할아버님에게 붙잡혔다.
“서아야, 연서도 이제 어리지 않다. 밖에 나가서도 저렇게 함부로 입을 놀리면 주씨 집안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이번이 마지막이다. 만약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이 늙은이가 직접 가르칠 수밖에 없구나!”
주윤우의 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네.”라고 대답했다.
귀부인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던 주 회장님의 시선 끝에 바닥에 흩어진 구슬들이 들어왔고, 그의 눈빛이 잠시 멈칫했다.
“얘야, 이거 설마 저번에 네가 구해왔던 그 염주 아니냐?”
주씨 집안 전체에서 정령은이 역술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할아버님뿐이었다.
정령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가사도우미가 찻주전자를 들고 왔다. 할아버님이 계시니, 그녀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얌전히 굴었다.
그녀는 무릎을 반쯤 굽힌 채 정령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정령은은 조금 우스웠다.
“주 할아버님, 이번에 제가 온 건 순전히 할아버님 체면을 봐서예요. 하지만 다음번엔 장담 못 하겠네요.”
“주씨 집안 가사도우미가 손님에게 함부로 막말을 하다니, 정말 다시 보게 되네요.”
차를 따르던 가사도우미 박미영의 손이 덜덜 떨렸고, 온몸이 공포에 휩싸였다.
주 회장님은 정령은의 말뜻을 즉시 알아차렸다.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박미영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귀신에 씌어서 정령은 씨께 막말을 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부디 정령은 씨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박미영이 머리를 “쿵, 쿵” 소리가 나게 찧었지만, 정령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런 잔챙이를 직접 상대하는 것은 칼로 닭 잡는 격이었다.
주 회장님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경호원들에게 박미영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회장님! 저를 내쫓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주씨 집안에서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했는데, 공은 없어도 고생은 했잖아요. 어떻게 남 때문에 저를 내쫓으실 수 있습니까….”
박미영은 경호원 두 명에게 양팔을 붙잡혀 밖으로 끌려 나갔다.
정령은에게 빌어도 소용이 없자, 아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 나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상스러운 욕설을 들으며 주 회장님의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당장 끌어내!”
사람이 끌려 나간 후에야 거실은 평온을 되찾았다.
“령은아, 화내지 말거라.”
정령은은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곧 죽을 사람한테 화내서 뭐 하겠어요?”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저 가사도우미는 짙은 죽음의 기운에 휘감겨 있었다.
그녀의 운명에 이런 겁액이 있었으니, 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그녀의 능력에 달린 일이었다.
주 회장님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그녀와 주윤우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저 주윤우 씨랑 이혼했어요.”
공기 중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주 회장님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풀었다. 순식간에 몇 년은 더 늙어버린 듯했다.
“우리 주씨 집안이 너에게 면목이 없구나. 윤우가 돌아오면, 내가 단단히 혼을 내주마!”
다른 사람은 정령은의 대단함을 모를지 몰라도, 그는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정령은은 역술인에, 얼굴도 예쁘고 실력도 있었다. 만약 자기 손자와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주윤우에게 그럴 복이 없었다.
할아버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은은 가방에서 숙면부 한 장을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한 달 뒤에 다시 한 장 드릴게요. 별일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령은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노인이 급히 그녀를 불러 세웠다.
“령은아, 내 오랜 친구 하나가 요즘 곤란한 일을 겪고 있다더구나. 내가 잘 물어보고, 확실해지면 연락처를 보내주마.”
정령은은 주씨 집안을 나섰다.
시내로 가는 길에, 그녀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원래 목적지는 호텔이었지만 갑자기 일정을 변경했다.
제로 바에 도착한 정령은은 곧장 2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주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층 카운터석 옆, 이준호는 팔에 깁스를 한 채 미녀가 먹여주는 과일을 받아먹으며 계단 쪽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윤우 형, 저 정령은 또 형 찾아온 거 아니야? 내가 걔 미련 못 버렸을 줄 알았어!”
이준호는 음험한 눈빛을 드러내며 정령은에 대한 혐오감을 극도로 표출했다.
“내 말은, 그냥 아주 끝장을 내버려야 한다니까! 그래야 형한테 질척거리지 않지.”
또 다른 한량이 맞장구를 쳤다. “나도 이준호 말이 맞다고 봐. 정령은 저 촌뜨기가 어떻게 윤우 형 짝이 되겠어. 오늘 우리가 2층 룸으로 안 가길 잘했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주윤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는 풀리지 않는 짙고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비우고 벌떡 일어섰다.
이준호가 물었다. “윤우 형, 어디 가?”
주윤우는 말없이 2층으로 향했다. 이준호와 다른 한 명은 눈빛을 교환하고는,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