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룸 안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문우빈의 친구는 그와 마찬가지로 호탕한 성격이라 정령은에게 연거푸 술잔을 권했다.
술 두 박스를 다 비웠을 때쯤에야 서가영이 뒤늦게 도착했다.
그녀는 온몸을 꽁꽁 싸맨 채로 들어와, 문을 닫고 나서야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를 벗었다.
정령은을 보자마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다.
“령은아!”
서가영이 살갑게 몸을 부벼오자 정령은은 조금 귀찮아하면서도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령은아, 우리 우빈이한테 너 이혼했다는 소식 들었어. 진짜야? 내 말이 맞지, 진작에 헤어졌어야 했어. 주윤우 같은 놈은 너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마침 요즘 업계에 남자 아이돌 연습생들이 몇 명 들어왔는데, 하나같이 다 잘생겼더라. 나중에 내가 령은이 너한테 소개해 줄게…….”
서가영은 수다쟁이였다.
한번 말문이 트이자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정령은은 멜론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뭐 좀 먹어.”
오늘 밤 모이기로 한 사람들은 전부 도착했다. 문우빈이 종업원에게 신호를 보내자, 케이크를 밀고 들어와도 좋다는 뜻을 알아차렸다.
무려 10층짜리 케이크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순식간에 룸 전체에 퍼져나갔다.
불이 꺼지고, 소원을 빌 시간.
정령은은 두 손을 모았다.
주윤우에게 바보처럼 매달리지 않고 정신을 차리게 해준 하늘에 감사했다.
정령은이 촛불을 불어 껐다.
케이크를 나누던 중, 서가영은 문득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말했다. “나 여기 오는 길에 옆 골목에서 교통사고 난 걸 봤는데, 사람이 차에 치여서 십 미터는 날아갔대!”
서가영이 과장되게 입을 쩍 벌렸다. “이름이 뭐 이준호라던가…….”
“이준호?”
문우빈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는 즉시 정령은을 쳐다봤지만, 그녀의 얼굴은 담담해서 조금도 놀란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령은아, 그 쓰레기 진짜 죽은 거야?”
그 말이 나오자 룸 안은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서 소리치던 남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었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정령은은 태연하게 멜론을 한입 베어 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냥 받아야 할 죗값을 받은 것뿐이야.”
아무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저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쳤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정령은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령은아, 너 점 볼 줄 알아? 내 운세 좀 봐주면 안 돼? 설마 나도 그렇게 쉽게 죽진 않겠지.”
“비켜봐, 령은이가 나 먼저 봐줘야 해. 나 요즘 피 볼 일은 없지?”
“령은아…….”
문우빈과 서가영은 인파에 밀려났다.
서가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문우빈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고 나서야 그녀는 상황을 이해했다.
여자는 분노에 찬 얼굴로 욕을 퍼부었다. “내가 주윤우 그 자식 좋은 놈 아닐 줄 알았어! 지가 사귄 친구라는 것들도 하나같이 양아치들이고! 령은이 코앞에서 욕을 하는데도 가만히 있었다니, 그게 남자 새끼야?”
“내 말이 그 말이야. 잘 죽었어! 아까 내려가서 신나게 방방 뛰기라도 할걸…….”
오늘 술자리는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술집 문 앞에서 문우빈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서가영을 한 손으로 부축하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모자를 푹 눌러주었다.
서가영은 요즘 뜨는 라이징 스타라 그녀를 찍으려는 파파라치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비록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령은아, 내가 먼저 너부터 데려다줄까.”
“아니야, 너는 가영이나 잘 챙겨.”
정령은은 문우빈의 차가 떠나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가로등이 길 양옆에 외롭게 서서 여자의 그림자를 아주 길게 늘어뜨렸다.
이준호가 사고를 당한 장소는 술집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바닥에는 검붉은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주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정령은의 눈앞에는 두 개의 귀신 그림자가 보였다.
귓가에는 처참한 애원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눈앞에서 차에 치여 죽는 장면 좀 그만 보여주세요…….”
“해인대학교 입학 정원 필요 없어요. 돌려드릴게요. 제발 저 좀 놔주세요……. 당신 동생 일은 정말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거예요…….”
이준호의 혼은 사고 현장에 묶여 있었다.
그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었고, 그의 곁에는 시커멓고 살기 가득한 귀신 그림자가 서 있었다.
정령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고가 나기 전, 이준호는 단 한 번도 이렇게 비참한 적이 없었다. 아니, 이렇게 절망적인 적이 없었다고 해야 맞겠다.
악귀는 어떤 수단을 써서 이준호가 차에 치이는 장면에 계속 갇히게 만들었고, 당시의 고통과 생명이 서서히 꺼져가는 공포를 반복해서 체험하게 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잘한 짓이었다.
충분히 구경한 정령은이 입을 열었다. “됐다, 이리 와.”
원래 이준호 옆에 웅크리고 있던 악귀는 정령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순식간에 그녀 앞으로 떠 왔다.
거칠고 쉰 목소리가 울렸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술가님.”
정신이 붕괴될 정도로 고문당한 이준호를 보면서도 악귀의 마음속 분노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그는 이준호를 증오했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동생 하나만 있었다.
힘들게 노력해서 해인대학교에 합격했지만, 갑자기 누군가에게 정원을 빼앗기고 말았다.
억울해서 따지러 찾아갔지만, 상대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시켜 그를 때렸다. 결국 손찌검이 너무 심해 죽게 되자, 시체를 바다에 던져 상어 밥으로 만들어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
그는 눈을 감지 못했고, 어쩌면 하늘이 불쌍히 여겨 악귀가 되어 이준호 곁에 붙어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이준호가 자신의 친동생을 더럽히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만약 정령은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복수는 이렇게 빠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준호는 넋이 나간 채 허공에 떠 있었고, 두 눈은 초점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정령은이 말했다. “악한 자는 마땅한 벌을 받는 법이야.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녀는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이준호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며칠은 더 살았을지도 모른다.
정령은은 이준호를 향해 걸어갔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텅 빈 길 위에 정령은 혼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한 명의 사람과 두 명의 귀신이 있었다.
이준호는 공포에 잠겨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차가운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났다.
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정령은!”
그는 이를 갈며 힘없이 여자의 이름을 외쳤고,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혼 전체는 생전에 차에 치였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팔은 탈골되었고, 다리 한쪽은 부러졌으며,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죽어서도 그렇게 팔팔하네. 바퀴벌레도 너보단 끈질기지 않겠다.”
정령은은 가차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방금 전 너무 시달린 탓에 기력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맞받아쳤을 것이다.
그는 겨우 숨만 붙어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문득 악귀와 정령은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뇌리에 섬광이 스치며 순식간에 모든 것을 깨달았다.
“정령은! 네가 한 짓이지? 이게 다 네놈의 계략이었어! 네가 날 죽인 거야! 이 악녀 같은 년!”
이준호는 입을 벌려 분노를 토해냈고, 핏빛 눈물이 눈가에서 흘러내렸다. 그는 정령은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정령은은 위험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서 순식간에 이준호의 목이 졸렸다.
“이준호, 네가 뿌린 씨앗을 왜 나한테 탓하는 거지? 어차피 죽을 운명, 일찍 죽고 일찍 환생하는 게 낫지. 아, 아니지. 넌 환생 못 하겠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