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내가 눈뜬장님인 줄 알아? 방금 이쪽으로 오다가 네가 진아를 미는 걸 똑똑히 봤는데, 어디서 발뺌이야.”
윤진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태준 오빠, 언니가 저보고 상간녀래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한국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의사 선생님이 제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충격받으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저 그냥 내일 M국으로 돌아가서 요양할까 봐요. 언니는 제가 돌아온 게 싫은가 봐요.”
김지연은 강태준에게 목을 잡힌 채 벽에 밀쳐졌다. 손에 들고 있던 검사 결과지가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전해지더니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심장 가장 부드러운 곳이 그에게 찔려 구멍이라도 난 듯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차가운 바람이 몸속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다음 순간 죽을 것만 같다고 느꼈을 때, 아래에서 뜨거운 액체가 천천히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눈물을 머금은 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내 아가, 제발 무사해야 해.’
“강태준, 제발… 제발 나 좀 놔줘….”
시야가 흐려지고 귓가도 웅웅거렸다.
어렴풋이 윤진아가 계속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준 오빠, 언니 탓하지 마세요. 그냥 살짝 밀었을 뿐인데, 제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못 버틴 거예요.”
강태준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김지연은 이미 천 번도 넘게 죽었을 것이다.
“누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친동생을 이렇게 모질게 괴롭힐 수 있어. 진아 심장이 아주 안 좋은 거 몰라? 그런 심한 말로 자극하고, 밀기까지 해? 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 가만 안 둬.”
강태준은 싸늘한 말을 남기고 손을 놓았다. 그는 돌아서서 바닥에 쓰러진 윤진아를 안아 일으키더니, 쏜살같이 진료실을 향해 걸어갔다.
김지연은 윤진아를 안고 황급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심장이 꽉 조여와 숨쉬기조차 힘든 고통을 느꼈다. 윤진아가 걱정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자신을 목 졸라 죽였을 것이다.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끼며, 김지연은 아랫배를 감싸 쥔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검사 결과지를 하나씩 주워 모았다. 마지막 한 장을 집어 들었을 때, 반짝이는 검은색 구두 한 켤레가 그녀 곁에 멈춰 섰다.
“지연아, 왜 그래?”
김지연이 고개를 들자, 강지환의 부드러운 얼굴이 보였다. 목소리마저 봄바람처럼 다정했다.
강지환은 그녀 옆에 쪼그려 앉아 서류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그의 시선이 초음파 사진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
순간, 김지연의 아랫배에 경련이 이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덮쳤다. 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연아, 어디가 안 좋아?”
김지연은 너무 아파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연아, 걱정 마. 작은아버지가 바로 의사 선생님한테 데려다줄게.”
김지연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들린 것은 그 말과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몸이 붕 뜨는 느낌과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느껴졌다. 강지환이 자신을 안고 달리고 있었다.
기억이 통째로 두 시간쯤 사라진 것 같았다. 김지연은 그 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병원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
창가에 길고 훤칠한 등이 서 있었다.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다림질이 잘되어 주름 하나 없는 흰 셔츠.
그 몸만 봐도 강 씨 집안의 유전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작은아버님?”
김지연이 조심스럽게 부르자, 강지환이 소리를 듣고 돌아봤다.
“지연아, 좀 어때? 물 마실래?”
김지연은 한 손을 아랫배에 올렸다. “작은아버님, 저는….”
강지환은 의자를 끌어와 곁에 앉았다.
“걱정 마. 아가는 무사해. 너도 무사해야 하는 거, 알지?”
아가가 무사하다는 말에 김지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비밀을 강태준의 작은아버지가 가장 먼저 알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작은아버지를 몇 번 본 적 없어, 그다지 친한 사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처음 그를 본 것은 공항에서였다. 유수현을 마중 나갔을 때, 유수현이 달려와 흥분해서 말했다.
“방금 무테안경 쓴 지적인 남자 봤는데 완전 대박이야. 진짜 내 남자로 만들고 싶다.”
둘이 공항을 나왔을 때, 그가 강태준의 차에 타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야 김지연은 그가 강태준의 작은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지연은 흩어진 생각을 갈무리했다. 강태준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낙태를 강요할까 봐 두려웠다.
“작은아버님, 저 좀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세요?”
강지환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강 씨 집안에 새 식구가 생기는 이렇게 좋은 일을 왜 숨기려는 거지?”
“저… 저희 이혼할 거예요. 이미 이혼 합의서에 사인했어요.”
강지환은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그는 뚫어질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참의 침묵 끝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로 해줄 수 있어.”
김지연은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어쩐지 작은아버지가 자신을 볼 때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언행은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 조금도 선을 넘는 구석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작은아버님. 그런데 오늘 병원에는 어쩐 일이세요?”
“약을 좀 처방받으러 왔다가, 네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뭘 줍고 있는 걸 봤어.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은 누워있어야 한다고 하더라. 감기에… 유산기까지 있다고. 꼭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해, 알았지?”
김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세 많이 졌어요, 작은아버님. 바쁘시면 먼저 가보세요. 저는 괜찮아요.”
강지환이 침대 옆 링거대를 힐끗 쳐다봤다. 아직 약물이 삼분의 일가량 남아 있었다.
“이거 다 맞을 때까지만 있을게. 간병인 두 분 문밖에서 대기하도록 해뒀어. 무슨 일 있으면 작은아버지한테 전화하고. 아직 연락처 없지? 저장해 둬.”
김지연은 휴대폰 잠금을 풀고 강지환의 번호를 저장한 뒤, 카톡 친구도 추가했다.
링거액이 다 들어가고 간호사가 주삿바늘을 빼주자, 강지환은 정말로 자리를 떴다.
김지연은 병원에서 칠 일을 꼬박 채우고 무사히 퇴원했다. 그동안 강지환은 매일 밤 한 번씩 찾아와 삼십 분 정도 머물다가, 그녀가 저녁 식사를 마치는 것을 보고 돌아갔다.
퇴원하는 날, 지방에서 돌아온 유수현이 그녀를 데리러 와 자신의 집으로 곧장 데려갔다.
유수현은 개인 작업실을 운영하며 맞춤 의상을 제작했다.
유명세는 없어서 평소에는 인지도가 낮은 인플루언서나 무명 연예인들의 주문만 간간이 받았지만, 일이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는 원래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정해진 시간에 일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의 집 인테리어 역시 그의 성격처럼 자유분방했다. 2층의 객실은 항상 김지연을 위해 비워두었지만, 그녀가 자고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강태준의 소유욕이 강해서 그녀가 밖에서 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지연이 유수현의 집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강태준에게 소식이 들어갔다.
강 씨 그룹 총재실.
강정우가 보고했다. “강 대표님, 드디어 사모님을 찾았습니다. 방금 유수현 씨 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강태준은 미간을 문질렀다.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짙었고, 기분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어디 있었는지는 알아냈나?”
강정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사모님께서 지난 일주일간 마치 증발하신 것처럼 어디에서도 행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부하들이 경시를 샅샅이 뒤졌지만… 대표님께서 병원에서 사모님을 마주치신 그날, 공교롭게도 병원 CCTV가 고장이었고, 병원 근처 거리 CCTV에서도 사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강태준은 네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런 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면서, 내가 강 비서를 둬서 뭐 하나? CCTV가 고장 난 건 명백히 누군가 손을 쓴 거야. 병원에서 진료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강정우는 겁을 먹고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자신의 수하들이 밤낮없이 꼬박 칠 일을 조사하고도 실마리 하나 찾지 못한 것을 보면, 대체 어떤 신통한 인물이 사모님을 흔적도 없이 숨겨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강태준은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강정우가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차는 유수현의 집 앞까지 내달렸다. 강태준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강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도 올라와.”
그 시각, 유수현은 강태준 그 쓰레기를 향해 입에 착착 감기는 욕을 퍼붓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 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