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지환 씨은 어쩐 일이세요?”
아래층 거실, 강지환이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청원동 빌라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모님, 일어나셨습니까? 회장님께서 아침 일찍부터 사모님을 보고 싶어 하셔서, 본가에 며칠 묵으시도록 모시러 왔습니다.”
말을 건넨 사람은 윤 집사였다.
강지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온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했다.
“형님이 시키신 일입니다.”
탁자 위에는 끓여 놓은 찻물이 반 주전자나 비어 있었다. 그녀를 반나절은 기다린 모양이었다.
김지연의 귓가가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유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손님이 오셨는데 왜 위로 올라와서 절 안 깨우셨어요?”
유 아주머니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조금 멋쩍은 듯 입을 열었다.
“사장님께서 나가실 때 푹 주무시게 하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어요. 어젯밤에… 피곤하셨을 거라고….”
김지연의 예쁜 눈썹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이게 무슨 망측한 소리란 말인가!
어젯밤 두 사람은 분명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의 말 때문에 이렇게 애매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하필이면 이 말을 어른인 시동생이 들었으니 무척이나 민망했다.
“사모님, 제가 짐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윤 집사가 먼저 이 적막한 분위기를 깨고 그녀의 손에 들린 캐리어를 받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왔다. 김지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강태준이 할아버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 이렇게 대대적으로 사람을 보내 그녀를 데리러 올 줄이야. 윤 집사는 평소 온 집안의 대소사를 관리하느라 좀처럼 밖으로 나서는 일이 없었다. 할아버님께서 윤 집사를 보내신 것도 모자라 시동생인 강지환까지 보냈으니, 그녀로서는 거절할 핑계조차 찾을 수 없었다.
강태준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도망칠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또한 강씨 집안에서 그녀가 할아버님의 말씀을 가장 잘 듣는다는 것을 알고, 할아버님을 내세워 그녀를 꼼짝 못 하게 묶어두려는 속셈이었다.
마당에는 강 회장이 평소에 타는 카니발이 세워져 있었다.
김지연이 차에 오르자 맞은편에 앉은 강지환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 모두 잠시 침묵했다.
강지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때요?”
김지연은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 그것은 강씨 집안에서 오직 시동생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그녀는 강지환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비밀을 지켜주고, 강태준과 대립하면서까지 외부인인 자신의 편에 서준 것에 대한 감사였다.
“괜찮아요.”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예의 바른 미소를 돌려주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따라야죠.”
강지환의 짧은 몇 마디에 김지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마치 불 위에 올려진 것처럼 해명할 수도,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시동생이 방금 유 아주머니의 말을 오해해서, 그녀와 강태준이 어젯밤 격렬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 후로 차 안의 분위기는 다시 기묘해졌다. 물론 이런 기묘함을 윤 집사는 느끼지 못했다. 그는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겨우 본가에 도착하자 윤 집사는 캐리어를 곧장 강태준의 방으로 옮겼다.
거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시끌벅적했다.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쉴 새 없이 위층 강예성의 방으로 무언가를 나르고 있었다.
위층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지연은 할아버님을 뵈러 가려다, 마주 내려오던 주방 담당 서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강예성 씨는 왜 그래요?”
서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예성 아가씨가 어젯밤 어쩌다 테라스에 갇혀서 하룻밤을 꼬박 얼어붙어 있었대요. 그래서 감기에 걸렸는데, 누가 일부러 그런 거라며 CCTV를 확인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어요. 우린 다 강씨 집안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사람들인데, 무슨 원한이 있다고 아가씨한테 그런 짓을 하겠어요?”
김지연이 위로했다. “바쁘실 텐데 어서 가보세요.”
서 아주머니는 “에휴.” 하고 한숨을 쉬며 깨진 그릇을 들고 강예성에게 줄 음식을 다시 만들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김지연이 위층으로 올라가자 마침 정지미가 강예성의 방에서 수심 가득한 얼굴로 나왔다. 그녀는 김지연을 보자 눈빛이 반짝였다.
“지연아, 왔구나?”
김지연은 할아버님을 뵙기도 전에 시어머니에게 이끌려 아래층 거실로 내려갔다.
“예성이가 저렇게 다 커서도 속을 썩이네. 감기 한 번 걸리면 어릴 때랑 똑같이 떼를 쓰니. 약도 안 먹고 의사 선생님도 안 보려고 하고. 역시 너희 부부가 제일 맘 편하게 해준다니까.”
“아프면 원래 성격이 좀 까칠해지잖아요. 병원에 정 가기 싫어하면, 가정의 선생님이라도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김지연이 이렇게 말한 것은 저택 마당에 들어설 때 강씨 집안의 가정의 차가 있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이미 진료를 봤을 거라 짐작했기에, 그녀는 강예성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시어머니에게 예의상 한 말일 뿐이었다.
“봤어, 봤어.”
정지미가 대답했다.
위층에 있던 강예성은 밖에서 들려오는 김지연의 목소리를 듣자 마치 싸울 준비를 하는 수탉처럼 돌변했다. 머리도 안 아프고 속도 괜찮아졌다. 그녀는 그대로 이불을 박차고 김지연과 싸우기 위해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왔다.
“김지연, 착한 척 그만해. 네가 사람 시켜서 한 짓이지?”
김지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누굴 시켜서 뭘 했다는 건데?”
정지미가 급히 다가가 강예성을 껴안으며 방으로 데려가려 했다. “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니. 네 새언니는 이제 막 들어왔는데 뭘 할 수 있겠어?”
강예성은 잔뜩 화가 나 있어 정지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엄마, 엄마, 이거 놔. 이 계집애 가면을 내가 벗겨버릴 거야. 다들 쟤가 불쌍한 척하는 거에 속고 있는 거라고. 지난번에 내가… 한 것 때문에 앙심을 품고 사람 시켜서 날 테라스에 가둔 게 분명해. 이 집에 쟤 끄나풀이 있는 게 틀림없어.”
강예성은 감정이 격해져 거의 펄쩍펄쩍 뛰었다. 정지미가 허리를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정말 김지연에게 달려들어 손찌검이라도 할 기세였다.
김지연은 정지미에게 제압당한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얼굴에 싸늘한 미소를 스치듯 띄었다.
“지난번에 뭘 했는데?”
강예성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집에서는 할아버님이 그녀를 감싸고돌았기에, 지난번 일을 대놓고 말할 용기는 아직 없었다.
할아버님이 김지연을 대하는 태도를 생각하자 강예성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외부인 주제에 어떻게 할아버님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할아버님은 자신보다, 친손녀인 자신보다도 그녀를 더 아꼈다.
“김지연, 이 여우 같은 년. 불쌍한 척해서 할아버님 동정이나 얻는 거 말고 뭘 할 줄 아는데? 자신 있으면 나랑 정면으로 붙어봐. 내가 널 봐줄 것 같아….”
김지연은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할아버님을 보고 입술을 깨물며 입 밖에 나오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녀의 눈에는 억울함이 가득했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강예성의 언어폭력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계단을 등지고 있던 강예성은 김지연이 또다시 모든 것을 양보하는 척하는 태도를 보이자, 마치 솜뭉치에 주먹을 날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김지연의 그 가면을 벗겨내고 싶었다. 김지연이 겉보기처럼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지연, 이 미친년아! 와봐! 저질러놓고 인정도 못 하지? CCTV 확인하면 무섭냐? 그냥 네 스스로 인정하고 무릎 꿇고 싹싹 빌어. 안 그러면 내가 그 CCTV 우리 오빠한테 넘길 거야. 그럼 오빠가 널 바로 차버릴걸. 너 같은 신분으로 감히 우리 강씨 집안에 시집을 와? 우리 오빠 신발 들어줄 자격도 없어!”
김지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강예성은 마침내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자, 할아버님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회장이 화를 내자, 방 안의 모든 사람들이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일하는 하인들조차 조심하며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려 했다.
정지미는 여전히 강예성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가 김지연에게 달려들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격이 유순해서 자녀들을 말로만 교육할 뿐, 여전히 자식들에게 약했다. 심지어 큰 소리로 꾸짖는 법도 거의 없었다.
강예성의 그런 안하무인 재벌 아가씨 성격은 그렇게 길러진 것이었다.
“아버님, 제가 예성이 방으로 바로 데리고 들어가겠습니다.”
눈치 하나는 빠른 정지미였다. 그녀는 회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예성은 정지미의 눈치를 보고 나서야 겨우 얌전해졌다.
강 회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강예성에게 손짓했다.
“너, 이리 오너라.”
회장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누구도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강예성은 할아버님이 자기 편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김지연에게 승리의 눈빛을 보내며 애교 섞인 태도로 할아버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