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그녀의 카드를 정지시킨 건 그저 그녀를 저택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압박 수단일 뿐이었다. 평소에는 순하고 약해서 그에게 큰소리 한번 못 내던 작은 여자가 이런 일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이지, 하루 만에 다시 보니 괄목상대할 만했다.

190억. 감히 이런 액수를 요구하다니!

강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슈트 재킷의 맨 아래 단추를 잠그며 밖으로 나섰다. 강 비서가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차가 은행 앞에 도착했을 때, 김지연과 유수현이 막 안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돈을 찾지 못해 함께 투덜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차에 오르려는 순간, 강태준이 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돈 챙겨서 떠날 생각이었나. 나랑은 이제 상종도 안 하겠다?”

김지연은 그의 강력한 기세에 눌려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다 등 뒤가 차 문에 닿았다.

강태준은 그녀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오른쪽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 여자는 정말로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돈만 받고 떠나려 하다니. 이 집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없다는 말인가.

정이 없는 여자. 아마 진작부터 떠날 생각이었겠지?

김지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에게 따져 물었다.

“당신이 내 카드 막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네가 가출하지 않았으면 내가 네 카드를 막았을까? 집에서 편하게 잘 먹고 잘 지내는 게 싫어서 나와서 고생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래도 내 카드를 막을 자격은 없어요. 그 안에 든 돈은 전부 다 제가 번 거니까.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강태준은 순간 멍해졌다. 결혼 3년 만에 그녀가 이렇게 기세등등하게 말하는 건 처음 봤다. 평소에는 토끼처럼 순하기만 했는데.

“네가 무슨 돈을 벌었다고. 일 년 삼백육십오일 중에 삼백일은 보석 전시회나 보러 다니면서.”

내 말 없었으면 넌 진작에 굶어 죽었을 거라는 뜻이었다.

옆에 있던 유수현이 더는 듣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무슨 개소리야. 우리 지연이가……”

“식충이. 맞아요, 전 그냥 식충이에요.”

김지연이 유수현의 말을 끊었다. 분노가 가슴속에서 마구 날뛰었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주얼리 디자이너였다. 단지 예명으로만 작품을 발표했을 뿐. 그는 그 사실을 몰랐다.

일부러 숨긴 적은 없었다. 가끔 집에서 작품을 디자인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녀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그리는 것을 들여다볼 리도 만무했다. 그의 눈에 그건 그저 그녀의 변덕스러운 낙서일 뿐이었으니까.

결혼 3년. 그녀는 자신의 중심을 가정에 두었지만, 돌아온 것은 그의 경멸뿐이었다. 그의 눈에 그녀는 그의 돈을 쓰는 것 외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였다.

이제 와서야 김지연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죽음 같은 정적을 깬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할아버님에게서 온 전화였다.

“지연아, 오늘 태준이랑 같이 저녁 먹으러 오너라. 뉴질랜드에서 항공 직송으로 온 가재가 막 도착했단다. 할아버지가 네가 이거 제일 좋아하는 거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은 손도 못 대게 하고 전부 너 주려고 남겨 뒀어.”

“할아버님, 저는……”

김지연은 그에게서 벗어나 조용히 혼자 있고 싶은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친손녀처럼 아껴주시는 할아버님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강태준이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할아버님, 저희 저녁에 들어갈게요.”

전화를 끊고 강태준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가자.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김지연은 그 자리에 몇 초간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강태준에게 팔을 붙들려 차 안으로 쑤셔 넣어졌다.

그녀가 겨우 자리를 잡자마자 강태준이 정교한 작은 상자 하나를 휙 던져 주었다.

김지연은 그가 억지로 안겨준 것을 손에 들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회사 다음 분기 주력 상품이야. 론칭 행사 끝나면 한정 판매될 거니까, 가지고 놀아.”

김지연이 상자를 열자, 안의 내용물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바로 지난달에 자신이 디자인했던 보석 펜던트가 아닌가? 스케치를 80퍼센트 정도 완성했을 때 기이하게 사라져서 서재를 샅샅이 뒤져도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떻게 갑자기 강씨 그룹의 다음 분기 주력 상품으로 둔갑한 거지?

“이 보석 펜던트 디자이너가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강태준은 그녀의 반응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진아가 디자인했어. 어제 강씨 그룹과 계약하고 강씨 그룹 주얼리 수석 디자이너가 됐지. 이 목걸이가 바로 귀국 후 내놓는 그녀의 비장의 카드야. 분명 대박 날 거다.”

윤진아를 칭찬한 뒤, 그는 그녀를 깎아내리는 말도 잊지 않았다. “봐봐. 네가 그리던 그 낙서 쪼가리들이랑은 차원이 다르지.”

강태준은 윤진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뿌듯한 표정을 띠었다. 아마 그 자신조차 몰랐겠지만, 그의 말에는 온통 자랑이 묻어났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희대의 보물이라도 소개하는 것처럼.

김지연은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작품을 도둑맞았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미완성 스케치가 어떻게 윤진아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강태준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도둑질 따위는 할 리 없었고, 더군다나 그녀가 그린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녀의 스케치는 집 서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설마 날개가 돋쳐 윤진아의 손으로 날아가기라도 한 걸까?

김지연이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마 차멀미 때문인지 메스꺼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입과 코를 막고 몇 번 헛구역질을 했다.

그 덕분에 점심도 못 먹어서 위가 뒤집힐 것 같았지만, 토할 것도 없었다.

강태준이 티슈 한 팩을 건네며 의아하게 물었다. “너… 이번 달에?”

김지연은 그의 질문에 몸이 흠칫 굳었다. 이번 달 생리를 했던가?

머릿속이 풀처럼 흐릿해져 마지막 생리가 언제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여전히 속이 너무 안 좋았다. “멀, 멀미…”

“우웁—”

말을 마치자마자 또다시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차멀미를 핑계로 얼버무리자 강태준은 마음속 의심을 거두고 강정우에게 지시했다.

“일단 갓길에 잠시 세워.”

강정우가 임시로 주차할 만한 곳을 찾아 차가 막 멈춰 섰을 때, 김지연이 채 진정하기도 전에 강태준의 전화가 울렸다.

“태준 씨, 나 지금 너무 힘든데, 좀 와줄 수 있어요?”

차 안이 너무 조용해서, 교태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세 사람의 귓가에 선명하게 맴돌며 김지연의 만신창이가 된 심장에 또 하나의 비수를 꽂았다.

강태준은 방금 꼴사납게 토하던 여자를 곁눈질로 흘끗 보더니, 얼굴을 돌려 강정우에게 명령했다.

“출발해. 옥룡만 아파트로.”

방금 멈췄던 차는 다시 주 도로로 진입해 옥룡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차가 움직이자 김지연은 다시 격렬하게 구역질을 했다.

기억이 맞다면 강태준은 옥룡만에 고급 아파트 한 채를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 선물로 강 할아버지가 사준 것으로, 두 사람 공동 명의로 등기되어 있었다. 3년 동안 비어 있던 그곳을 이제 와서 다른 여자를 숨겨두는 용도로 쓰고 있다니.

생각할수록 우스웠다.

차가 속도를 내자 김지연은 더 심하게 토했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지고, 미간이 찌푸려졌으며, 콧등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꼭 불쌍한 작은 짐승 같았다.

강태준은 드물게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 손을 뻗어 등을 쓸어주었다.

“조금만 참아. 진아는 심장병이 있어서 지체할 수 없어. 아니면 나한테 기댈래?”

김지연은 옆으로 몸을 움직여 그를 피했다. 온몸을 문에 바싹 붙인 채, 낯설고 서먹한 태도를 보였다.

“부탁인데, 저 좀 내려주세요. 멀미 때문에 지금 너무 힘들어요.”

강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와 강압적으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무슨 심술이야? 심장병 환자랑 뭘 따져. 그건 발작하면 정말 위험한 병이야. 몇 번 토하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김지연이 힘껏 몇 번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남녀의 힘 차이는 현격했다. 그녀의 몸부림은 그저 하룻강아지가 범에게 덤비는 격이었다.

강태준은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귓가에 속삭였다.

“기대는 거 불편해? 아니면 무릎에 앉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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