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김지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는 그녀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김지연은 몇 초간 몸이 붕 뜨는 느낌을 받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무릎에 앉혀져 머리가 그의 가슴에 꾹 눌려 있었다.
귓가에 그의 힘찬 심장 소리가 울렸다. 이 느낌에 김지연은 잠시 자신도 그에게 소중히 보살핌받는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두 사람이 이혼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꽉 안겨 있는 이 느낌을 탐하게 되는 자신이 어쩔 수 없었다.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무감으로 안았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가슴속 사슴이 배를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마지막 방종이라고, 김지연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강 비서는 핸들을 쥔 채 최대한 차를 평온하게 몰았지만, 김지연은 시도 때도 없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속이 불타는 듯 화끈거렸다. 배가 고파서인지, 토해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옥룡만에 도착하자, 강태준은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아파트 동으로 걸어갔다. 병색이 완연한 김지연과 강정우만 차 안에 남겨둔 채였다.
차창을 열자 신선한 바깥 공기가 훅 밀려 들어왔다. 김지연은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강 비서님은 여자친구 있으세요?”
강정우는 갑자기 호명되자 사모님이 여자친구를 소개해주려는 줄 알고 서둘러 자신의 연애 상황을 밝혔다.
“최근에 선봐서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이미 양가 부모님도 뵈었고, 혼인 신고할 생각입니다.”
김지연은 입술을 오므리며 “음.” 하고는 말했다. “잘됐네요, 축하해요. 이 목걸이 가져가서 약혼녀에게 선물하세요. 아주 예쁜 루비인데, 여자라면 다들 좋아할 거예요.”
강정우는 사모님이 내미는 정교한 작은 상자를 보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사모님, 이 목걸이는 현재 전 세계에 딱 두 개뿐입니다. 하나는 발표회용으로 남겨두고, 다른 하나가 바로 사모님 손에 있는 겁니다. 이건 강 대표님께서 사모님께 드리는 진심 어린 마음입니다!”
강정우가 어찌 감히 받을 수 있겠는가. 값비싼 가격은 둘째치고, 그건 강씨 집안 사모님의 지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강 대표님이 알면 그는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강씨 그룹이 분기마다 내놓는 신제품은 가장 먼저 사모님께 가지 않던가. 다른 누가 그런 복을 누릴 수 있겠는가.
“사모님, 그냥 잘 간직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좀 이따 강 대표님께서 나오셔서 사모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시면, 저 정말 큰일 납니다.”
강정우는 경계하며 밖을 살폈고, 강태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지연은 강정우가 받지 않으려 하자 더는 권하지 않고 물건을 가방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알았어요. 비서님이 안 받으면 좀 이따 다른 사람 줘야겠네요.”
사실 이 물건은 지금 보고만 있어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가 올라간 지도 꽤 됐는데, 지금쯤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벌써 천둥과 지진이 만나듯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본처로서 직접 그를 데려다주고, 바보같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꼴이었다.
정말이지 우스웠다.
위층, 강태준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곧장 지문으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윤진아가 달려들어 그의 품에 푹 안겼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옥 같은 몸이 품에 가득 찼다.
“진아야, 어디가 안 좋아. 지금 바로 병원 가자.”
윤진아는 그가 오기 전 일부러 청순가련한 메이크업을 하고, 웨이브 머리에는 헤어 에센스를 여러 번 뿌려 등 뒤로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흩뜨려 놓았다. 온몸에서 빛이 나는 그녀에게 아픈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강태준의 탄탄한 허리를 꽉 끌어안고 그의 가슴에 몸을 비볐다.
“태준 씨, 방금 심장이 너무 두근거렸어. 혹시 심장병이 도진 거 아닐까? 못 믿겠으면 만져볼래?”
강태준은 들어올 때 너무 서두른 탓에 정신이 좀 멍했는데, 그녀가 괜찮은 걸 보니 냉정을 되찾으며 이성이 조금씩 돌아왔다.
“일단 나 좀 놔줘.”
그는 팔을 벌려 내리지도 못하고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윤진아가 허리를 꽉 껴안자, 까닭 모를 짜증이 밀려왔다.
“진아야, 앞으로 이런 장난은 치지 마.”
윤진아는 아쉬운 듯 그를 놓아주었다. 그의 빈틈없는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엄숙했다.
“화내지 마. 그냥 좀 보고 싶어서 그랬지. 오늘 가지 않으면 안 돼?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돼지갈비찜 했는데.”
“오늘은 일이 있어서. 다음에 보자.”
그녀가 괜찮은 걸 확인한 강태준은 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아래층에 병든 사람이 하나 있으니, 아무래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
윤진아는 그가 가려는 것을 보고 다급해졌다.
“태준 씨, 나랑 몇 분만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보여줄 게 있어.”
윤진아는 서재로 가 오랫동안 그린 작품을 꺼내 와 보여주었다.
“태준 씨, 이거 봐. 내가 디자인한 커플링이야. 의미는 ‘정절과 약속’. 이걸 우리 결혼반지로 하는 거 어때?”
강태준은 오늘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 어쩌면 김지연이 토한 것 때문인지, 말투도 건성으로 나왔다. “네가 알아서 결정해. 때 되면 장인한테 만들라고 할게.”
윤진아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가 결혼반지에 이의가 없다는 건,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뜻이 아닐까? 그와 결혼하기까지 이제 마지막 한 걸음만 남았다. 수년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마지막 한 걸음은…
그녀가 노력해서, 속도를 내야 했다.
“태준 씨, 갈비 한 점 먹을래? 오후 내내 끓였어. 오빠 주려고 일부러 배운 건데, 손도 데었단 말이야.”
윤진아는 애교를 부리며 강태준을 주방으로 이끌었고, 강태준은 억지로 갈비 한 점을 받아먹었다.
그가 차로 돌아왔을 때, 김지연은 그의 몸에서 나는 고기찜 냄새와 향수 냄새가 섞인 것을 맡고 속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
강태준은 숨을 들이쉬고는 그녀를 힐끗 쏘아보았다.
“방금 내가 걸어와서 차에 타기 전엔 멀쩡한 거 봤는데, 왜 내가 들어오자마자 토하는 거지?”
김지연은 잠시 멈칫했다. 순간 헛것을 들었나 싶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가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일부러 아픈 척해서 당신이 애인 만나는 걸 막으려고?”
강태준은 그녀의 말에 격분했다.
“말 조심해. 네 신분이 뭔지 잊지 말고.”
김지연은 소리 없이 웃었다. 속이 완전히 상해버린 그런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차창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윤진아를 애인이라 칭할 수 있을까. 이혼 합의서에 서명한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자격이 없었다.
그녀의 이런 순한 양처럼 만만해 보이는 모습에 강태준은 화가 수그러들었다.
그는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김지연의 창백한 작은 얼굴이 창에 기대어 있었고, 눈꺼풀은 아래로 처져 있었다. 예전의 도톰했던 입술은 핏기 하나 없었다. 목 한쪽에는 차에 탈 때 그가 꼬집었던 옅은 붉은 손자국 두 개가 남아 있었다.
보면 볼수록 만만해 보였다.
“이리 와!”
그가 명령조로 차 안의 정적을 깼다.
김지연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속 안 좋다며. 계속 그렇게 기댈 거야?”
김지연은 고개를 홱 돌리며 고집스럽게 무시했지만, 또다시 그에게 강제로 무릎 위에 앉혀졌다. 다음 순간, 그의 가슴에 묻은 옅은 립스틱 자국을 본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무슨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기에 그에게 끌려와 강제로 이런 꼴을 봐야 하는 걸까?
강태준이 가슴께가 축축해진 것을 알아차렸을 때, 차는 이미 본가 마당에 멈춰 서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품 안의 여자를 들어 올리고는, 더러워진 자신의 셔츠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차에서 내린 후, 강태준은 걸음을 조금 늦췄다. 김지연은 종종걸음으로 따라가 그의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집에 돌아올 때의 정해진 절차였다. 이런 연기는 이미 숙달될 대로 숙달되어 있었다.
층고가 십여 미터에 달하는 거실은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었다.
강 회장님은 불교 신자여서, 문을 들어서자 풍기는 은은한 단향에 김지연의 속이 한결 편안해졌다.
윤 집사님이 목청을 높여 집 안을 향해 외쳤다. “회장님, 도련님하고 사모님 오셨습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김지연에게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사모님, 조금만 더 늦게 오셨으면 저 새우들 못 지킬 뻔했어요. 예성 아가씨가 오후 내내 조르는데도 회장님께서 꼼짝도 안 하시고, 사모님 오시기만 기다리셨다니까요.”
강태준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병아리 같은 위장으로, 새우 열 마리면 하루 종일 배부를걸.”
강 회장님이 서재에서 나오셨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고희에 가까운 노인이었지만, 관리를 잘한 덕에 목소리에 힘이 넘쳐 칠십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느냐? 지연아, 이리 오너라!”
김지연은 다정하게 “할아버님.” 하고 부르며, 얌전히 회장님 곁으로 가 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