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강예성은 거들먹거리며 자리를 뜨더니, 핸드폰을 꺼내 윤진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임무 완수!”

그렇게 김지연을 테라스에 가둬 버린 것이다.

김지연은 바지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핸드폰이 없었다.

그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시간이면 할아버님은 이미 주무시고 계실 터였다. 할아버님은 불면증이 있으셔서 한번 깨시면 다시 잠들기 힘들어하셨다. 그녀는 큰 소리를 내서 할아버님을 깨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김지연은 문에 기댄 채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문득 이 시간에 강태준과 윤진아는 뭘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거리 연애를 막 끝낸 커플이 뭘 하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실소를 터뜨렸다.

밤이 되자 바람이 불었다. 김지연은 심신이 지쳐 있었다. 어젯밤 그런 일을 겪고, 돌아와서는 또 그에게 시달렸으니, 지금은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녀는 문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김지연? 정신 차려, 김지연…….”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가운데, 김지연은 자신이 따뜻한 품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자 조각칼로 깎은 듯 완벽에 가까운 턱선과 산봉우리처럼 솟은 목젖이 보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것을 만져 보았다.

“움직이지 마. 열나.”

김지연은 겁을 먹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언제나 말을 가장 잘 듣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와 두꺼운 이불을 덮고 나서야 몸이 서서히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강태준이 몇 분 뒤 약과 물을 들고 돌아왔다. 김지연은 그가 짜낸 작은 알약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뱃속에 아기가 있는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만약을 대비해 약을 먹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강태준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목욕물 좀 받아줄 수 있어? 몸 좀 담그고 싶어서.”

말을 뱉고 나니 자신이 좀 엉뚱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강씨 집안 도련님이 어떻게 목욕물을 받아줄 리가 있겠는가. 자신이 그럴 자격이나 되나?

예상과 달리 다음 순간, 그는 손에 든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알아서 마셔. 내가 시중까지 들게 하지 말고.”

아마도 아프다는 특권을 얻은 덕분일까. 강태준은 물컵과 약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뜨거운 물을 받고 있었다.

김지연은 그 틈을 타 약 두 알을 몰래 숨기고 물 한 컵을 깨끗하게 비웠다.

잠시 후, 강태준이 욕실에서 나와 침대 머리맡의 빈 컵을 훑어보았다.

“약 먹었어?”

“응.”

“옷 벗고 씻어. 물 다 받았어.”

강태준이 옷장에서 깨끗한 목욕 수건을 꺼내 욕실로 향했다. 김지연이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의아해하며 묻기도 전에, 그의 말이 들려왔다.

“들어와. 씻겨 줄게.”

김지연의 얼굴에 피가 확 쏠렸다. 두 사람은 3년간 부부 관계를 가질 때도 늘 불을 끄고 했다. 아직 그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씻을 용기도 없는데, 심지어 그가 씻겨 준다니.

강태준은 욕실에 수건을 두고 나왔지만 그녀가 따라 들어오지 않자, 다시 돌아왔다. 김지연이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멍하니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놀리듯 말했다.

“뭘 그렇게 내숭 떨어. 내가 안 본 데가 있어, 아니면 안 만져본 데라도 있나? 욕조에서 잠들어서 익사할까 봐 그러는 거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김지연은 그의 말에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나, 우리 이혼했잖아. 지금은 다르다고. 좀 비켜줬으면 좋겠어.”

하루 동안 그녀에게 몇 번이나 이혼했다는 사실을 상기당하자 강태준은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는 넥타이를 풀어 침대 옆에 던지고 셔츠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이불을 걷어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아직 서류 처리도 안 끝났잖아. 난 아직 네 여보라고. 무슨 일 생기면 제일 먼저 나부터 찾아야 하는 거, 알아 몰라?”

그는 그저께 밤에 강도를 당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지만, 김지연이 그 마음을 알아줄 리 없었다.

“그럼 정식 수속은 언제 밟을 건데?”

김지연의 한마디가 그를 그대로 격분시켰다. 강태준은 원래 그녀를 욕조 가장자리에 앉혀 옷을 벗겨주려 했지만, 이젠 그대로 손을 놓아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김지연은 그대로 물속으로 빠졌고, 튀어 오른 물이 그의 가슴팍 셔츠를 흠뻑 적셨다.

김지연이 입고 있던 유일한 잠옷이 피부에 착 달라붙어, 이제는 입으나 마나 한 차이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얼굴의 물기를 훔치고는, 태연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죽기를 각오한 듯 다시 물었다.

“언제 수속 밟을 건데. 나 더는 못 참겠어.”

강태준은 화가 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그렇게 참기 힘들어? 아니면 네 민준 오빠라도 빨리 찾아가고 싶어서?”

그가 민준을 신경 쓰고 있었다.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그 사람을.

김지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혼 수속 언제 끝낼 건지, 정확한 시간이라도 알려줄 수 있어? 오늘은 네 동생이 날 테라스에 가둘 수 있었지만, 내일은 날 죽일 수도 있는 거잖아.”

강태준은 그녀의 해명을 믿지 않았다.

“갇힌 건 네가 멍청해서 그런 거지. 유치원 때 누가 괴롭히면 맞서 싸우라고 안 가르쳐줬어?”

그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큰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너, 매일 밤 잠꼬대로 민준 오빠 부르는 거 알기나 해? 네가 한 번 부를 때마다, 난 널 내 밑에 깔고狠狠的 짓밟아주고 싶었어.”

“어제처럼 말이지?”

김지연이 되물었다.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덮치고, 심장에 비수까지 꽂았던 그 일 말이다.

강태준은 무언가 떠오른 듯, 시선이 그녀의 다친 팔에 멈췄다.

상처에 물이 닿았으니, 꽤 아플 것이다.

그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그녀를 옭아매던 손을 풀었다. 김지연의 두 뺨에 또렷한 손자국이 몇 개 더 생겼고, 새하얀 피부 위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그렇게 이혼이 급해?”

김지연은 시선을 피했다. 이 순간, 불타는 듯한 그의 눈빛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눈빛에는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응, 급해.”

“내일 오전 열 시. 호적 등본 들고, 구청에서 봐.”

그는 한마디를 툭 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김지연은 그제야 냉정을 되찾았다. 정말 이혼이라는 단계에 이르자, 자신이 겉으로 꾸며낸 것처럼 태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3년의 정. 사람이 기계도 아닌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마음을 거둘 수 있겠는가. 심장은 여전히 찢어질 듯 아팠다.

이 모든 게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강태준은 차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우고, 한참 뒤에 친구 송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서 술 한잔하자.”

송태우는 막 클럽에서 나온 참이었다. 그는 시간을 확인했다.

“씨발, 왜 이제 전화해. 난 이미 한탕 뛰었는데. 너 같은 유부남은 이 시간에 부부 감정이나 교류해야 하는 거 아니냐?”

“헛소리 말고, 늘 가던 데서 기다려.”

송태우가 아레나 클럽에 도착했을 때, 강태준은 이미 혼자 술을 마셔 알딸딸한 상태였다.

“네가 이렇게 늦게까지 싸돌아다니면, 나중에 우리 지연이가 무릎 꿇게 안 해?”

강태준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입꼬리를 비틀며 되물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연이가 네가 함부로 부를 이름이야?”

“너 이 개자식, 집에서도 지연이한테 이렇게 험하게 구는 거 아니지?”

송태우는 몇 마디 빈정거리더니, 컵을 들어 자신에게 술을 따랐다. 그러다 바닥만 남은 레드 와인병을 집어 들고 몇 번이고 자세히 뜯어보더니, 병을 끌어안고 늑대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내 95년산 로마네 콩티! 1년 동안 아껴뒀던 걸, 너 같은 개자식이 이렇게 다 처마셨냐?”

“다음에 두 병 사주면 될 거 아냐.”

강태준은 컵에 든 술을 단숨에 털어 넣고, 웨이터에게 다시 술장으로 가서 술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송태우는 간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 기세라면 자기가 여기에 보관해 둔 술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배를 활짝 열고 마구 마셔대기로 했다. 이 개자식 혼자만 좋게 놔둘 수는 없었다.

강태준은 손가락 사이에 낀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진아 귀국했어. 내일 이혼하러 갈 거야.”

송태우는 마시던 술을 그대로 뿜을 뻔했다.

“지연이가 너랑 이혼하겠대서 울적한 술 마시는 거냐?”

강태준이 피식 웃었다.

“어느 쪽 눈으로 봐야 내가 울적한 술을 마시는 걸로 보여? 그리고 이혼은 내가 하자고 한 거야. 이건 축하 파티라고, 알겠어?”

송태우가 아무리 뜯어봐도 그의 얼굴에서는 기쁨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여자한테 차인 것처럼 쓸쓸해 보였다. 그는 강태준을 자극하고 싶은 마음에 참지 못하고 말했다.

“축하 파티라 이거지. 그건 내가 전문이지. 내일 이혼 서류 받으면, 내가 교외에서 불꽃놀이 쇼라도 한번 열어줄까? 네 애인 데리고 가서 보라고.”

“너 미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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