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긴급 속보입니다. 오전 10시 23분, K항공 KA620편이 태평양 상공에서 비행 임무 수행 중 실종되었습니다….
물, 사방에서 물이 세차게 밀려들었다. 터질 듯한 흉부의 압박감과 숨 막히는 질식감에 서윤아는 미친 듯이 손발을 허우적거렸다.
그 순간, 몸 아래에서 부력이 느껴지며 그녀를 위로 밀어 올리는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귓가에 파도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번쩍 눈을 떴다.
내가 왜 욕조에 앉아 있는 거지?!
서윤아는 분명 A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승무원이 기내식을 나눠 줄 때 비행기가 격렬하게 흔들렸고, 뒤이어 누군가 날개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소리쳤다.
비행기는 바다로 추락했고, 사람들이 허둥지둥 구명조끼를 입는 속도보다 바닷물이 차오르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기내 수위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 순간, 서윤아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목구멍이 간질거려 서윤아는 연신 기침을 터뜨렸다. 그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익숙한 얼굴을 보자마자 서윤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억울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두 팔을 뻗어 안아 달라는 듯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후야!”
긴 속눈썹에 아직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서윤아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로 가득 찼다.
강지후는 서윤아의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때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에 골인했다. 이 세상에서 서윤아를 가장 아껴 주는 사람을 꼽으라면, 강지후가 2등일 때 1등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윤아는 강지후가 예전처럼 자신을 꼭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추며 꿈은 가짜이니 곁에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해 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거칠게 목을 졸렸다.
그제야 서윤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강지후 같으면서도, 강지후가 아닌 것 같았다.
“누가 보냈지? 감히 이런 얼굴로 변장하다니, 간도 크군!”
남자의 차갑고 음산한 시선이 서윤아의 얼굴에 꽂혔다. 마치 그녀를 통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했지만, 그런 감정은 1초도 안 되어 사라지고 곧이어 잔혹하고 그늘진 빛으로 대체되었다. 짙게 깔린 살기에 서윤아의 동공이 바짝 조여들었다.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지금 당장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야. 네 손으로 그 얼굴을 바꾸든가, 아니면 내가 망가뜨려 주든가.”
어조는 가벼웠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 속에는 장난이 아니라는 뜻이 명확히 담겨 있었다.
말을 마친 남자는 몸을 바로 세우고 옆에 있던 티슈를 뽑아 들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손을 힘주어 닦아 냈다.
서윤아의 머리카락에서는 아직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추워서이기도 했고, 무서워서이기도 했다.
기억 속의 강지후는 늘 웃는 얼굴로 그녀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전부 받아 주었다. 그녀가 소년미 넘치는 깔끔하고 청량한 모습이 좋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중에 아버지가 되고 그룹의 총수가 된 후에도 그는 다른 사장님들처럼 헤어 오일로 머리를 넘겨 성숙한 모습을 연출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서윤아는 그를 놀리기도 했다. 그런 남대생 같은 분위기로는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말이다.
강지후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여전히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언제나 산뜻하고 청량한, 마치 햇살 같은 향기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3대 7 가르마로 빗어 넘긴 머리, 몸에 딱 맞게 재단된 검은 셔츠의 단추는 두 개나 풀어헤쳐져 있었다. 한때 맑았던 눈동자는 어둡고 차갑게 가라앉아 사람을 압도하는 냉기를 뿜어냈다.
기억 속의 강지후가 햇살 아래 배를 드러내고 기지개를 켜는 따뜻하고 살가운 고양이었다면, 눈앞의 남자는 어둠 속에 웅크린 채 송곳니를 드러낸 흑표범 같았다. 언제든 방심한 틈을 타 사냥감의 숨통을 물어 끊을 것처럼.
시선이 남자의 쇄골에 닿았다. 그곳에는 눈에 거의 띄지 않는 흉터가 있었다. 예전에 그녀를 구하려다 깨진 창문 유리에 베인 상처였다.
서윤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의 눈가에 자리 잡은 잔주름을 보며, 세월의 깊이가 느껴져 멋있긴 하지만…….
“왜 이렇게 늙었어?”
변화는 컸지만, 서윤아는 눈앞의 남자가 강지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매처럼 날카롭고 음산한 눈이 가늘어졌다. 강지후의 안색은 한층 더 험악해졌다. 그는 혐오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는 똑같이 흉내 냈군. 아쉽게도, 난 대체품 따윈 찾지 않아. 누가 널 보냈든, 죽고 싶지 않으면…….”
“지후야, 나 몰라보겠어? 뭐야, 지금 나 꿈꾸는 거야, 아니면 시간 여행이라도 한 거야! 말도 안 돼!”
협박은 채 끝나기도 전에 끊겼다.
서윤아는 화가 나서 물을 한번 철썩 내리치고는 씩씩거리며 쏘아붙였다. “너 강지후 맞지?!”
강지후는 말없이 그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모습을 봤다면 아마 겁에 질려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강 대표님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 거라는 신호였으니까.
서윤아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서웠지만, 지금은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게다가 상대방의 익숙한 얼굴을 보니 두려움보다 화가 더 컸다.
“너 예전에 운성시 서안구 동항 골목에 살았지! 너 뭐든지 다 잘하는데, 유일하게 음치잖아! 너 망고 알레르기 있는데, 내가 좋아한다고 억지로 항히스타민제 먹으면서 같이 먹었잖아, 너…….”
서윤아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줄줄이 쏟아냈다.
아프게 졸렸던 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하다 보니 눈물이 터져 나왔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이런 취급까지 받아야 한다니.
울다 보니 또 창피해져서, 아이처럼 팔을 들어 눈물을 닦아 냈다. 강지후가 직접 목을 졸랐다는 사실에 억울함은 배가 되었다.
서윤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말을 이어 갈수록 눈앞의 남자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다리 옆에 늘어뜨린 두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가의 핏발은 방금 전 격노했을 때보다 훨씬 더 심했다…….
“누구야, 당신.”
목이 멘 듯한 쉰 목소리. 메마른 세 글자는 온몸의 힘을 다 짜내야만 겨우 목구멍에서 나올 수 있는 듯했다.
“서윤아! 나 서윤아야! 내가 누구겠어!”
서윤아는 욕조에서 걸어 나왔다. 닦을수록 더 많이 흘러나오는 눈물에 시야가 흐릿했다. 그녀는 옆에 있던 목욕 가운을 집어 들고는,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남자를 힘껏 밀쳤다.
“비켜, 바보 멍청아!”
바보 멍청이는 서윤아가 화날 때마다 강지후에게 하던 욕이었다.
문밖으로 밀려난 강지후는 비틀거리며 벽에 기댔다. 물에 빠졌다 구조된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바닥을 짚었던 손을 주먹으로 말아쥐고 벽을 힘껏 내리쳤다.
잔뜩 찌푸렸던 미간이 조금 풀렸다.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 마디를 보며 강지후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아팠다.
욕실 안에서 서윤아는 젖은 옷을 벗고 목욕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감정을 쏟아내고 나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비행기 사고가 꿈이 아니라는 건 확신했다. 옷도 비행기를 탔을 때 입었던 그 옷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에 와 있는 걸까, 강지후는 또 왜 저러는 걸까?
밖으로 나가 강지후와 이야기를 나눠 보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그녀는 그대로 꽉 끌어안겼다.
익숙한 품에 서윤아의 잔뜩 긴장했던 신경이 조금 풀렸다. 그녀는 투덜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비행기 사고로 분명 바다에 빠졌는데,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여기 와 있어. 그리고 아까 그 태도는 또 뭐고…….”
말을 이어 가던 서윤아는 순간 멈칫했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축축함. 강지후가…… 울고 있었다.
“윤아야, 네가 실종된 지 15년이나 됐어. 미치도록 널 찾아다녔다고, 윤아야.”
허리를 조여 오는 팔의 힘을 느끼며 서윤아는 멍해졌다.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