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강은우는 박 집사보다 귀가 훨씬 밝았다. 그는 이미 바깥의 소란을 듣고 있었고, 당연히 자신을 부르는 ‘은우’라는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속에서 더욱 화가 치밀었다. 누가 감히 자기를 그렇게 부르래!
벅찬 마음에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온 서윤아는 아들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기도 전에, 하늘이 무너질 듯한 한마디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꺼져. 그 여자, 나한테서 떨어져!”
순식간에 훌쩍 커 버린 아들을 본 서윤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강은우의 목에 걸린 자신이 직접 만들어 준 목걸이를 보자 마음이 다시 안정되었다.
아무리 커도 내 새끼는 내 새끼지!
숨을 깊게 들이마신 서윤아는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은우야, 이게 정말 믿기 힘든 일이겠지만….”
강은우는 듣지 않았다. 그는 서윤아를 완전히 무시하고, 뒤따라 들어온 아버지를 향해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스무 살 청년의 키는 이미 아버지와 맞먹었다.
“왜 이런 짓을 하시는 거예요! 제 엄마는 아버지가 아무 여자나 데려와서 대신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요! 저 여자가 그럴 자격이 있어요?! 아버지, 미치셨어요?!”
분노에 찬 강은우가 비웃었다. “하긴, 아버진 원래 미쳤었죠.”
세상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부자 사이가 지금은 마치 숙적 같았다. 강은우의 눈에 서린 증오에 서윤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강지후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먼저 서윤아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끌어 자신의 팔에 끼게 했다.
그리고는 강은우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서재로 가서 얘기하자.”
역시, 너무 기이하고 황당한 일은 믿게 만들기 어려운 법이었다.
서재 안, 설명을 다 들은 강은우는 여전히 화가 식지 않은 상태였다.
“저 여자를 집에 들이려고 그런 허무맹랑한 이유까지 지어내세요?”
강은우는 아버지가 왜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들의 반응을 본 서윤아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강지후는 정말로 나를 믿는 걸까?
“네 엄마다.” 강지후는 서윤아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아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는 오래전에 죽었어요!”
강은우는 마음속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한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자 처음으로 그런 말을 소리쳐 뱉어냈다.
자신보다 별로 나이도 많아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를 보며 강은우는 고개를 저었다. 미쳤어, 미쳤어. 진짜 다들 미쳤구나.
“은우야, 우리 둘만의 비밀 기억나? 같이 목걸이 조각해서 아빠 생일 선물로 주기로 한 거. 목걸이 뒤에 우리 이름도 새기자고 했잖아….”
강은우의 표정이 의심으로 가득 찼다. 그건 분명 자신과 엄마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때 집사님들도 들었을 수 있잖아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거라고요.”
강은우는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전혀 믿지 않았기에 이 문제로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강지후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아버지가 누구랑 있든 상관 안 해요. 하지만 제 엄마랑 엮지는 마세요. 이 저택은 우리 엄마 거예요. 아버지랑 저 여자, 나가서 사세요. 다시는 우리 엄마와 관련된 어떤 것에도 손대지 마시고요!”
엄마를 언급하자 강은우의 표정에 잠시 연약함이 스쳤지만, 이내 독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자기를 궁지로 몰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듯이!
앳된 얼굴에서 위협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목소리는 날카롭고 사나워, 마치 포위되어 막다른 길에 몰린 새끼 늑대 같았다.
그런 강은우를 마주하고도 강지후의 표정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서윤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강은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연기 한번 잘하네!
“애를 대체 어떻게 키운 거예요! 애가 저런 말을 한다는 건, 당신이 아버지로서 충분한 안정감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잖아요. 우리 은우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내 새끼라고요. 꿀단지 속에서 커야 할 애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자라다니!”
서윤아는 마음이 아팠다. 아들이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강·불쌍한 꼬마·은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윤아가 훌쩍거리면서 아버지의 귀를 인정사정없이 비트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귀가 휠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감히 아버지에게 저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건 아버지의 태도였다. 그는 상대가 ‘괴롭히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손을 떼어내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화내지 말라며 낮은 목소리로 달래고 있었다.
“화가 안 나게 생겼어요? 지금 화나 죽겠으니까, 이따 저녁 먹지 말고 애들 어떻게 지냈는지 나한테 제대로 다 말해요!”
서윤아는 진작 물어봤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 망할 인간을 가엾게 여기는 게 아니었는데!
강지후에게는 가을바람에 낙엽 쓸듯 ‘잔인했던’ 서윤아는, 강은우에게 몸을 돌리자 봄바람처럼 따스한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었다.
“은우야, 이런 일이 받아들이기 힘든 거 알아. 하지만 이게 사실이야. 내가 정말 네 엄마야. 그동안 엄마가 곁에 없어서 우리 아가, 많이 서러웠지. 미안해.”
강은우는 속으로 되뇌었다. 저 여자는 미친 척하는 거다. 강씨 가문에 빌붙으려는 여자들은 무슨 미친 짓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너그럽고 부드러운 눈빛과 마주하고, ‘우리 아가’라는 말을 다시 들었을 때, 코끝이 저도 모르게 시큰해졌다. 갑자기 밀려드는 서러운 감정에 그는 어쩔 줄 몰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서윤아는 슬픈 듯 코를 훌쩍이고는, 자기 머리카락 몇 가닥을 뽑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아가, 경계하는 건 좋은 거야. 이거 내 머리카락이니까, 네가 믿을 만한 기관에 가져가서 유전자 검사해 봐. 데이터 보고서는 거짓말 안 하니까.”
“그동안 잘 생각해 봐. 우리 모자만 아는 일이 뭐가 있었는지. 보고서 결과 보고 나서, 나한테 와서 확인하면 되잖아, 응? 엄마는 계속 집에 있을게….”
서윤아는 차근차근 부드럽게 달랬다. 훌쩍 커 버린 아들은 어릴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빛과 행동에서 어린 시절의 그림자가 보였다.
강은우의 새끼손가락이 살짝 구부러지는 미세한 움직임을 보고, 서윤아는 아들이 자기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은우는 그 말을 받아들이려 애썼지만, 정말이지 너무 황당했다!
그는 다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 성큼성큼 다가와 머리카락을 집어 들고는 아무 말 없이 나가 버렸다.
아들이 떠나자, 서윤아는 강지후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에는 관심 없었다. 오직 세 아이의 성장 과정이 궁금할 뿐이었다.
비행기 사고 후, 블랙박스가 발견된 위치 근처에서 사망한 승객들의 시신이 속속 발견되었다. 지금까지도 기내에 있던 수십 명은 실종 상태로, 생사불명이었다.
서윤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강지후는 마음속으로 서윤아가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계속 품고 있었다. 그는 직접 팀을 이끌고 배를 타고 수색에 나섰고, 그런 수색은 1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강은우를 곁에 데리고 다녔지만, 어린 강은우는 배 위에서의 생활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저택으로 돌려보내 보모에게 맡겨야 했다.
쌍둥이는 어린이집에 맡겨져 전문가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강지후의 삶은 그때부터 일과 서윤아를 찾는 것,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 아이들은 소홀해졌고, 부자 관계는 점점 더 멀어졌다…….
“강은우는 어릴 때부터 기숙 학교에 다녔고, 설이랑 보름이도 평일엔 기숙사 생활을 했어. 개인 집사 열 명을 고용해서 애들 일상생활을 돌보게 했고….”
“윤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애들을 잘 돌보지 못했어. 화내지 마, 응? 앞으로 우리 가족, 행복하게 같이 살면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강지후는 서윤아의 소매 끝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애원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서윤아는 자신이 실종된 후 강지후가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지냈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머니를 잃은 후, 여러 가지 의미에서 동시에 아버지까지 잃은 셈이었다!
서윤아는 강지후를 서재에서 내쫓고, 혼자 바닥에 앉아 수납장에 있는 아이들의 지난 사진, 성적표, 개인 집사의 기록 등을 뒤적였다.
아이들에 대한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그녀는 되찾으려 애썼다.
서재 문밖, 한 방에 걷어차여 쫓겨난 강지후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이곳을 지켜야만 마음이 놓였다.
그날 밤, 강씨 가문 저택의 불은 밤새도록 환하게 켜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