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서윤아는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손에 들고 있던 앨범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밖은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다. 서재를 나선 그녀는 발밑을 보지 않고 걷다가 바닥에 있는 사람에게 걸려 넘어질 뻔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강지후였다.

두 사람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집사님이 휴대폰을 들고 2층으로 올라왔다.

“회장님, 아가씨 전화입니다.”

서윤아의 시선이 휴대폰에 뜨겁게 꽂혔다. 딸이었다! 쌍둥이 중 누나인 설날이었다.

강지후는 전화를 받아 들고는 센스 있게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서윤아도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빠, 장 비서님 권한 좀 늘려주면 안 돼? 다음부턴 2억 원 안 넘으면 따로 보고 안 하게. 안 그러면 너무 번거롭단 말이야. 지금 1억 6천만 원 필요한데, 내 국내 계좌로 보내줘. 다른 데로 보내면 안 돼. 나 바쁘니까 이만 끊을게. 바이.”

강지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설날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부녀간의 가장 주된 소통 창구는 전화였고, 그 내용은 보통 한쪽은 돈을 달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 돈을 주는 것이었다.

“집사님, 장 비서에게 연락해서, 그에게…”

“잠깐만요!”

서윤아가 강지후의 말을 끊고는 뻐근한 콧대를 주무르며 물었다. “애가 돈 달라고 하면 그냥 줘요? 설날이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데, 1억 6천만 원이나 필요한 일이 대체 뭐예요?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돈부터 보내려는 거예요?”

아이들이 생긴 후, 서윤아는 절대 아이들을 철없는 재벌 2세로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아직 딸과 만나보지도 못한 지금, 전화 통화 한 번에 강지후가 아이를 그렇게 키워놨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강지후는 서윤아가 금방이라도 불같이 화를 낼 듯한 기세에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윤아야, 당신이 그랬잖아. 딸은 귀하게 키우라고.”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강지후는 돈 문제에 있어서는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럼… 일단 돈 보내지 말까?” 강지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윤아는 말이 없었고, 그 모습을 본 강지후는 말을 이었다. “지금 바로 그 돈을 어디에 쓰려는 건지 물어볼게.”

전화기 너머의 설날은 발신자 표시를 보고는 자못 놀랐다. 돈을 달라고 한 후에 아빠가 다시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돈 어디에 쓰려는 거니?”

설날은 순간 멍해졌다. 아빠가 돈의 용도를 물어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냥… 그냥 쓰려는 거죠. 옷 사고 가방 사다 보면 금방 없어져요.”

설날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강지후는 서윤아를 쳐다봤다. 딸의 이 이유, 괜찮은 걸까? 돈을 보내줘도 되는 걸까?

서윤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딸이 명백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강지후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즉시 목소리를 차갑게 깔았다. “설날아, 아빠한테 거짓말하지 마라.”

설날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빠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생활에 간섭한 적이 없었다.

아빠의 능력이라면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우리 반에 집이 가난하다고 놀림받는 친구가 있어요. 제가 그 애한테 차 한 대 사주고, 걔를 비웃는 애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려고요.”

이번에는 서윤아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강지후가 물었다. “남자 동문?”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전화기 너머에서 나지막한 ‘응’ 소리가 들려왔다. “한시준은 몰라요. 제가 먼저 사주겠다고 한 거예요.”

“이유 불충분하다.”

설날이 무언가 더 설명하려 했지만, 전화는 끊겨버렸다. 그녀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고작 1억 6천만 원인데, 아빠가 어쩌다 이렇게 쪼잔하게 변했지?

저녁이 되자, 설날은 이모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아빠가 집에 여자를 데려온 걸 본 사람이 있다는데, 혹시 무슨 일인지 아느냐는 내용이었다.

설날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빠가 분명 이간질에 넘어간 거야! 죽일 놈의 나쁜 여자!

돌아가면 반드시 그 여자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이니 잠시 접어두고, 지금 전화를 끊은 강지후의 마음은 불안했다. 서윤아의 기분이 더 안 좋아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신, 애들한테는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쓰는구나.”

서윤아는 어금니를 갈며 한마디 뱉었다.

강지후처럼 영리한 사람이 자식들에게 마음을 조금이라도 썼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강지후는 변명 없이 즉시 잘못을 인정했다.

옆에 서 있던 집사님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그는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사모님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집사님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양보하는 쪽은 새 사모님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큰도련님이 잔뜩 굳은 얼굴로 집을 나가고, 회장님은 사모님 앞에서 남자다운 기개는 온데간데없이 완전한 공처가 꼴이었다!

당당한 강씨 그룹의 총수가 딸에게 1억 6천만 원을 보내주는 것마저 새 사모님의 눈치를 봐야 한다니, 밖에 나가서 말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새엄마가 생기면 새아빠가 생긴다’는 그 말이 어디서든 통용되는 모양이었다! 집사님은 속으로 미친 듯이 투덜거렸다.

그리고 집사님의 태도는 한층 더 공손해졌다.

회장님께서 저분을 위해 아들딸과도 얼굴을 붉힐 정도인데, 일개 집사인 자신쯤이야 갈아치우는 건 일도 아닐 터! 절대로 새 사모님께 밉보여서는 안 된다!

집사님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했다.

그래서 강미화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떠보려 했을 때, 집사님은 서윤아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강미화는 서윤아의 사촌 언니이자, 설날의 이모였다. 서윤아에게 사고가 생긴 후, 그녀는 종종 학교로 설날과 보름이를 찾아가곤 했다.

강은우는 어머니와 강미화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아예 상대를 안 했지만, 어린 두 아이는 그런 사정을 몰라 평소에 연락을 좀 더 자주 했다.

강지후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이들 곁에 돌봐줄 여자 어른이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강미화가 돈을 탐하면 그냥 주면 그만이었다.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런데 지금 강미화가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강지후 곁에 여자가 나타났다고 하자 허둥지둥 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온 것이다.

방으로 돌아온 집사님은 회장님이 지독한 애처가라는 충격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채, 강미화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저 여자는 매번 아가씨와 함께 있을 때마다 어른 행세를 있는 대로 다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서씨 집안의 안주인인 줄 알겠다니까. 그 속셈이 너무 뻔히 보였다!

대충 몇 마디 얼버무린 집사님은 전화를 끊고, 창밖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자신의 업무 일상이 매우 다채로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위층에서는 강지후가 자신의 점수를 만회하려 애쓰고 있었다.

“설날이는 해외에서 교환학생으로 있고, 다음 주에 돌아와. 보름이는 친구들이랑 옆 도시에 마라톤 대회 참가하러 가서 이번 주는 안 돌아오고.”

강지후는 아이들의 행적을 말하며 자신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증명하려 했다.

그는 서윤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팔로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한없이 부드러워졌다.

만약 집사님이 강지후의 이 애교 넘치는 모습을 봤다면, 아마 턱이 빠질 정도로 놀랐을 것이다.

서윤아는 강지후를 상대하지 않았다. 집안 상황이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은우는 작은 고슴도치 같고, 딸은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인 듯하며, 막내아들은…

아마 그 애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 푹 쉬고, 문제는 하나씩 해결해야겠다!

내일은 은우가 돌아올지도 모르니,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은우가 기억 속의 엄마를 다시 볼 수 있도록.

하지만 서윤아는 강은우를 기다리다, 다른 불청객을 마주하게 되었다.

“집사님, 이번에 산 차 괜찮네요. 향이 아주 좋아요.”

강미화는 집사님에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자꾸 계단 쪽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오늘 그 여자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강지후가 그렇게 오랫동안 결백하게 지내왔는데, 갑자기 나타난 여자는 강미화에게 마치 적과도 같았다.

그렇다. 강미화는 강지후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집사님은 몹시 난처했다. 강미화를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자신의 직분상 손님을 내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가씨에게 물건을 전해주러 왔다는 핑계까지 대고 있었다.

“이 붓은 내가 설날이 주려고 산 선물인데, 이 애가 깜빡하고 안 가져갔지 뭐예요. 아, 맞다, 집사님. 제가 듣자 하니…”

전화로는 알아낼 수 없으니, 강미화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와서 기다리면 그 여자를 못 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집사님, 누가 왔어요? 시끄럽네.”

강미화의 말이 뚝 그쳤다. 계단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운 자태의 여인을 보며,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상대방이 마스크팩을 하고 있었지만, 이목구비만 봐도 미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 빛이 날 정도로 하얀 피부, 풍만한 가슴과 탄력 있는 엉덩이, 매끄러운 목에는 목주름 하나 없었다…

그 모습을 훑어보던 강미화는 찻잔을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청춘은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법. 그녀가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젊고 요망한 것의 콜라겐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서윤아는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2층 베란다의 흔들의자에 누워 마음을 가라앉히려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한번 와본 것이었다.

적의와 질투로 가득 찬 강미화의 눈빛과 마주친 순간, 서윤아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고 속으로 모든 것을 파악했다.

이 사촌 언니는 정말이지 고질병을 고치지 못했다. 항상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냈다.

눈동자를 굴리던 서윤아의 마음속에 계략이 떠올랐다. 그녀는 애교 섞인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어머, 손님이 오셨네요.”

“내려오기 전에 우리 허니한테는 좀 더 자라고 했어요. 요즘 너무 피곤해해서. 이 여사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저한테 먼저 하세요. 제가 전해드릴게요.”

강미화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서윤아는 연기를 시작했다.

강미화 씨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집사님은 옆에서 속으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새 사모님, 장난 아니시네. 말 한마디로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