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윤태하는 그녀가 내뱉는 가벼운 사랑 고백을 세상에서 가장 혐오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소리가 그를 도발하지 않았다.
그러자 모행원이 그녀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소리, 다시 나 유혹해 봐.”
“내 모든 걸 다 줄 테니.”
평생을 철저한 이성으로 살아온 남자, 모행원.
소리를 만난 순간, 그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챕터 1
문이 열리자마자 소파 위에서 겹쳐 있는 두 몸뚱어리를 본 서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오는 내내 하서준의 집에 깜짝 등장해서 2년간의 장거리 연애를 끝냈다고 말하면 그가 얼마나 기뻐할까 상상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건 이렇게 추잡한 광경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소파 위의 두 사람은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그녀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꾹 참으며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 녹화 버튼을 눌렀다.
두 사람이 자세를 바꿀 때, 여자가 드디어 서연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하서준도 깜짝 놀라 황급히 담요를 끌어다 몸을 감싸고는 여자를 등 뒤로 숨겼다.
“네가 어떻게 왔어? 뭐 하는 짓이야?”
서연은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이렇게 멋진 장면은 당연히 기록해서 인스타그램에 올려야지.”
그 말에 하서준은 뒤에 있는 여자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요를 제 몸에 두른 채 소파에서 내려와 서연의 핸드폰을 빼앗으려 했다.
“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단체 메시지로 뿌려 버릴 거야.” 서연이 위협했다.
하서준은 전혀 믿지 않고 계속 다가왔다.
서연은 그대로 단체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하서준은 충격에 휩싸였다.
늘 온순하고 착하기만 하던 여자가 이렇게까지 독하게 나올 줄이야!
“서연, 죽고 싶어!” 하서준은 이마에 푸른 힘줄이 솟아오를 정도로 분노하며 서연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서연이 핸드폰을 들어 보이자 화면에는 112가 찍혀 있었다. “나 경찰에 신고했어.”
하서준은 눈을 크게 뜨고 말을 잇지 못했다. “너…….”
피도 눈물도 없이 독기만 남은 서연의 모습에 하서준은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좋아, 네가 이겼어!”
서연의 두 눈에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다. “2년이란 시간, 개한테 줬다고 칠게. 아니, 넌 개만도 못해.”
.
하서준의 집에서 나온 서연은 절친 유진의 집으로 갔다.
유진의 집에서 닷새를 머무는 동안, 유진은 닷새 내내 하서준을 욕했다.
이날 아침, 서연이 핸드폰을 보며 기운 없이 있자 유진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쓰레기 같은 놈 때문에 속상해할 가치도 없어.”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속상한 건 이미 끝났어. 그냥 서태환 씨가 알아봐 준 그 혼담 때문에 고민 중이야.”
“뭐?”
서연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혼처를 알아봤다며, 돌아와서 얘기 좀 해보자고 계속 재촉했다.
남자 쪽 집안이 좋고, 키 크고 잘생긴 데다 외아들이라고 했다.
그녀가 결혼에 동의만 하면 남자 쪽 집에서 십억 원대의 결혼 비용을 주고, 두 달 안에 임신하면 190억 원을 포상금으로 주며, 아들이든 딸이든 낳기만 하면 그 집안의 안주인이 되어 셀 수 없는 재산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유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손뼉을 탁 치며 비웃었다. “그거 네 새엄마 계략 아니야? 진짜 그런 좋은 자리가 있었으면 자기 딸을 시집 안 보내고 놔뒀겠어? 딱 봐도 함정이잖아.”
“뭐 아는 거 있어?”
“말 자체는 사실이야. 근데 제일 중요한 걸 쏙 빼놓고 말했네.”
“응?”
유진이 말했다. “그 남자 이름이 윤태하인데, 얼굴, 돈, 능력 다 갖춘 건 맞아. 예전엔 구성 시 여자들이 다 그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이었지. 결혼은 못 해도 하룻밤이라도 자보는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윤태하…….” 서연은 그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왠지 좀 익숙한데.”
유진이 코웃음을 쳤다. “구성 시 사람이면 그 이름 모르는 사람 없어.”
그녀는 말을 이었다. “작년에 불치병 걸려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기사가 터졌어. 원래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는데, 그 소식 듣고 바로 해외로 떴다는 것 같더라.”
“까놓고 말해서, 곧 죽을 사람한테 시집가는 건 그냥 시체랑 결혼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 거였구나. 생각보다 안됐네.
유진이 입을 삐죽였다. “새엄마가 생기면 새아빠가 생긴다는 말이 하나도 안 틀려. 네 새엄마는 너 과부 만들려고 작정한 거야.”
“그 사람이 죽으면 재혼하면 되지.”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너 진심으로 생각하는 거야? 그 남자 병이 그렇게 심하면 지금 몰골이 어떻겠어? 그리고 이 시점에 결혼할 사람을 찾는다는 건, 죽기 전에 후사라도 남기겠다는 거잖아.”
“그런 상황에 놓인 사람은 분명 변태일 거라고!”
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주는 게 많잖아.”
“…….”
“그리고 그 사람이 죽으면 내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잖아.” 서연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때가 되면 돈도 있고 자유도 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지.”
유진은 입을 떡 벌렸다. “너 혹시 충격받아서 정신 나간 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서연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사랑이란 건 귀신 같은 거야. 말로만 들어봤지, 본 적은 없잖아. 더는 쫓아다닐 필요 없어.”
“게다가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도 결국 돈 많이 벌어서 경제적 자유를 얻으려는 거 아니었어? 지금 지름길이 있는데, 내가 왜 마다해야 해?”
유진은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설득력 있게 들리지?”
서연이 웃었다. “현실이 원래 그런 거니까.”
.
그날 밤, 하서준은 다른 사람의 핸드폰으로 서연에게 전화를 걸어, 보기만 좋지 쓸모는 없는 여자라고 욕을 퍼부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또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어왔다. 서연은 연달아 몇 개의 번호를 차단하다가 결국 핸드폰을 꺼버렸다.
다음 날, 서연이 핸드폰을 켜자 수많은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대부분 하서준이 보낸 것으로, 입에 담지 못할 말들로 가득했다.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은 난리가 나 있었다. 잠자리 한번 한 적 없는데도, 하서준은 서연의 가슴이 수술한 것이라며 헛소문을 퍼뜨리고, 야하게 생겨서는 순진한 척한다고 욕을 해댔다.
한마디 한마디가 갈수록 심해졌다.
서연은 심호흡을 했다. 일어난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하늘이 그녀에게 그 쓰레기의 실체를 일찍 깨닫게 해주려고 그 장면을 목격하게 한 것이리라.
그녀는 서태환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녀는 윤태하 집안의 본가에 도착했지만, 윤태하를 만나지는 못하고 그의 부모님이 대신 나왔다.
서연이 윤태하와 결혼하겠다는 것을 알자 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서연의 요구는 단 하나, 혼인신고부터 먼저 하자는 것이었다.
법적인 관계가 우선이라는 게 그녀가 댄 이유였다.
결혼식은 필요 없다고 했다.
상대방은 당연히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결혼을 물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양측의 의견이 맞아떨어지자, 윤태하 아버님은 곧바로 구청 직원을 집으로 불러 혼인신고를 마쳤다.
바로 그때, 서연은 윤태하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사진 속 남자는 유진의 말대로 이목구비가 수려했다. 특히 깊고 힘 있는 그 눈빛은 사람을 홀릴 듯했다.
이런 최상급 남자가 시한부 인생만 아니었다면, 자신에게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을 것이다.
혼인관계증명서가 서연의 손에 쥐어졌다. 그녀는 합성된 것이 뻔했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한 증명사진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윤태하 어머님은 은행 카드를 꺼내 서연에게 건넸다. 결혼식은 올리지 않지만, 결혼 비용은 그대로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생활비도 따로 챙겨주었다.
아무튼, 굉장히 후했다. 그 액수가 어찌나 큰지 서연은 이 카드 한 장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았다.
다시 혼인관계증명서로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길이 ‘윤태하’라는 세 글자에 머물렀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을 ‘팔아넘긴’ 사실을 알면 저 남자는 어떤 기분일까.
.
아버지와 함께 윤태하 집안 본가를 나서자, 아버지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무척이나 기뻐했다.
“윤태하 집안에서 꽤 많은 걸 받으셨나 봐요.”
서태환은 순간 흠칫하며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연기 그만하세요.” 서연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두 분한테 이득이 없었다면 제 생각도 안 하셨을 거잖아요.”
서태환의 얼굴이 어색함으로 물들었다. “서연아…….”
서연은 손을 들어 그의 번지르르한 말을 막았다.
그녀는 앞서 걸으며 차갑게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앞으로는 연락하지 마세요.”
.
유진은 그녀가 정말로 윤태하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네 아빠 진짜 너무한다. 불 구덩이인 거 뻔히 알면서 널 밀어 넣어? 너도 바보야. 왜 그렇게 바로 혼인신고를 해? 그 남자가 널 괴롭히면 신고 안 했을 땐 도망이라도 칠 수 있지, 먼저 해버리면 죽이려고 들어도 도망도 못 가잖아.”
유진은 조급하고 화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친구가 화를 내자 서연의 마음은 따뜻해졌다. 그녀는 유진을 웃으며 달랬다. “혼인관계증명서는 받았지만, 그 사람 앞에 나타날 생각은 없어.”
유진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서연의 눈빛이 교활하게 빛났다. 조금 악독한 생각일지 몰라도, 사실이었다.
“그 사람 내년 2월을 못 넘긴다고 했잖아. 이제 세 달도 안 남았어. 일단 숨어 있다가, 그가 꼼짝도 못 하게 되면 그때 얼굴 한번 비추면 돼.”
서연의 계획은 완벽했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그 말을 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누군가 그녀를 찾아왔다.
“윤태하 씨께서 그의 아내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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